하얀 제대보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지면 어떨까? 눈에 거슬릴 것이다.
하지만 그 잉크자국 옆으로 다른 색깔로 물을 들이면 어떻게 될까?
여러분이나 내가 물 들이면 분명 엉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화가가 마음 먹고 물 들이기 시작하면 아주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이다.
우리 인생이 이렇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잘못해서 하얀 도화지에 손 때를 묻히거나 찢어버리거나 해서 하얀 도화지가 못 쓰게 되었지만,
그 찢어진 부분이나 손 때를 시작 점으로 삼아 하느님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려 주시거나
카드를 만드시거나 종이 비행기를 만드시거나
혹은 그냥 불쏘시개로 쓰시거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진행되는 과정에 결코 우리 힘이 미칠 수 없지만,
결국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거나 교훈이 되거나 시련이 되어서
우리를 단련시키고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우리와 하느님이 만들어 나가는 우리 인생이 아닐까 싶다.
페루에 가면 사막(자갈밭)을 도화지 삼아 거대한 그림을 그려놓은 곳이 있다고 한다.
그냥 평지에서는 알아볼 수 없고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봐야 알 수 있는 커다란 그림인데,
새 모양은 길이가 120미터 원숭이는 90미터, 도마뱀이 180미터나 된다고 한다.
이것도 비슷하다. 나양 평지에서 보면
단순히 조금 큰 도랑 같은 것이 길게 이어지다가 굽은 것처럼 보이고
그것이 무슨 그림이 되겠는가 싶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아주 놀라운 그림이 되고 도데체 저런 그림을 누가 그렸을까 싶을 것이다.
페루의 지상그림은 적어도 기원전 50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기에는 내 인생이,
또 내 신앙이 아무런 모습도 갖추지 못하고 뒤죽박죽이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지만,
높은 데서 하느님이 보시면 하나의 멋진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높은 데서 보는 눈이 필요하다.
그것이 신앙의 눈이다.
오늘 마리아께서 갖고 계신 눈이다.
분명하게 알아듣기는 힘들지만 하느님이 하시는 일엔 불가능이 없다는 말과
아주 늙어서 폐경에 이른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히 알아듣고
그것이 모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인 것은 믿는다는 그런 신앙의 눈이다.
그것은 또 하느님의 눈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분명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은
보잘 것 없고 가소로운 것 같지만 결코 무시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거대한 계획과 섭리안에서 우리 각자는
그분이 그리시는 그림의 아주 세밀한 한 부분이 되어
완벽한 그림을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 성무일도 독서기도 시편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주는 우리 영혼에 생기를 주시고 실족함이 없도록 붙드셨도다.
하느님 은덩이를 풀무불로 달구어내듯 당신이 우리를 단련시키셨으니,
올가미에 우리가 걸리게하시고 허리가 휘일 짐을 메워도 주시고,
말 타듯 우리의 머리 위를 원수들이 지나가게 하시어 물과 불을 우리는 거쳐왔사오나,
마침내는 편히 쉬게 하셨나이다.”(시편65)
요즘은 눈을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대구 경북에도 겨울에는 자주 눈이 내렸고,
벼 논이나 미나리논에는 얼음이 얼어서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놀았다.
밤새 하얗게 눈이 내린 것을 보면 다들 충동을 느낀다.
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예쁜 발자국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것도 저나 여러분이 하는 것보다 전문 예술가가 하면 훨씬 더 멋진 발자국 그림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무 생각없이 하얀 눈밭을 휙휙 휘저어 놓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지금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제대보에 물감을 찍을 때에도 아무렇게나 휙휙 뿌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지금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이다.
오늘 예수님이 성모님의 태중에 잉태된 복음을 들었다.
이것은 하느님이 인간 세상이라는 도화지 위에 예수님이라는 붓을 찍은 사건이다.
이제부터 예수님이라는 붓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실 것이다.
그 그림은 아주 아름다운 그림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붓이고 하느님이 화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각자도 서로 서로에게 물 들이는 삶을 살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한 서로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싶지 않아도 그려야 되는 그림을 서로에게 그리게 된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단체에 들어가서 관계를 맺는 순간부터
우리 각자는 “나”라는 물감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이게 된다.
그 물감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쁜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즉 이왕 우리 서로 각자에게 그림을 그리게 될 수밖에 없다면,
각자 서로에게 내 위에 좋은 그림을 그리라고 내 삶의 도화지를 잘 펼쳐주어야 한다.
성모님이 그렇게 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라는 붓이 성모님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종이를 펼쳐드린 것이다.
우리 각자도 성모님처럼 상대방이 나에게 그 사람의 물감을 잘 들이도록
내 삶의 도화지를 잘 펼쳐주어야 한다.
안돼, 하면서 마음 문을 닫아버리면 어쩔 수 없이 붓을 대고 그리는 그 사람은
스케치 북의 껍데기에 칠을 하게 된다.
올바른 그림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이 성모님의 삶에, 성모님의 육신에,
성모님의 영혼에 그림을 그리실 때 성모님의 동의를 구했듯이
우리도 각자에게 나라는 물감을 들일 때 동의를 구하고
할 수 있는 한 좋은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 먹고 잘 그려야 한다.
하느님이 인간 세상에 그림을 그리는 붓을 대었다.
분명히 멋진 그림을 그리실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실 수 있도록 성모님처럼 순종하는 마음으로 말씀 드리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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