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최 신부, 너무한다 너무 해! - 최재용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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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08-12-22 | 조회수987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최 신부, 너무 한다 너무 해! 사제가 된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의 의미도 짙게 깔려 있음을 체험 속에서 느끼며 살 때가 많다.
20여 년 전, 사제 서품을 받고 첫 부임지에서 활기찬 사목생활을 하던 시절, 가친께서 예기치 않게 찾아오실 땐, 나도 모르게 냉냉하게 맞던 때를 기억하곤 한다.
가끔씩 신부님들이 친척을 쌀쌀하게 대하는 것을 보면서... 사제는 이렇게 속세의 인연을 끊어야 하는구나 하고 가슴이 저리 곤 했다.
그런 내가... 나도 모르게 [출가]라는 미명 아래 불효자의 삶의 모습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것저것 생활의 군더더기가 붙어 가기 시작했음을 또한 통감한다.
똑똑함을 드러내려 억지를 쓰다 보니 고집스러워지고 괴팍한 성격이 거칠게 튕겨 나와 절어 붙었다.
모든 일에 만능인 체 자신을 억지로 과시하다 보니 거드름과 교만, 그런 내 모습에 고소함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열심 한 체 하려고 성무일도, 묵주의 기도, 성체 조배, 십자가의 길 기도 등의 중요성을 말로서만 참견하려 들었고...
레지오 마리에, 성령쇄신 운동, 꾸르실료, ME, MBW 등 신자들의 갖가지 신심운동에 통달한 사제인 양...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신자들을 채찍질할 때는 내가 현대판 바리사이파나 율법 학자가 아닌가 하고 가슴이 뜨끔할 때가 있다.
기도 중이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 그리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전광석화같이 스치는 좋은 말이나 이야기들이 생각날 때 메모를 하는 것도, 나 자신의 생활에 대한 좋은 교훈으로 삼기에 앞서 신자들에게 이런 것은 꼭 이야기해 주어야지... 하는 전달자의 통로 역할에만 익숙해져 버렸다.
이 단체 저 단체 얼씬거리면서 완벽한 사제 상을 보여 주려고 허세를 떠는 것도 이젠 나의 것이 되어 버렸다, 신자들을 대할 땐 적어도 자상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환한 얼굴을 만들어 보이니...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연출해야 하는 이른바 이중인격이 나의 성격이 되었음을 수긍하게 되었다.
부모님을 모시는 효성심도, 신자를 사랑하는 자애심도, 한 본당을 이끌어 가는 근엄함도 마음과 몸으로 어색하게 고질화 되어 버렸음에 애를 태우고 있다.
내 자신, 교구청에 대해서나 사회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과 불평, 불만을 속 시원히 털어놓으면서도, 신자들에게는 고분고분하고 더 나아가 맹종하도록 까지 길들이는 나에게 그런 이율배반적인 습성이 배어 있음을 볼 때,
아마 예수님도
"최 신부야! 너무한다, 너무해!"
하고 섭섭해 하실 것이 뻔하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배의 선장 노릇을 잘 한다고 자만하는 고약한 나의 허세에 나 스스로가 아연실색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성격이 까다로운 부모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며 사는 자녀들을 대할 때면,
또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 매일같이 울그락, 불그락 하면서도 서로 참고 사느라고 안간힘을 쓰는 부부들을 만날 때면,
본당 내의 여러 단체 임원끼리 뜻이 안 맞아 티격태격하면서도 본당신부가 큰소리 한번 치면 서로 안 그런 척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볼 때면,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렇게도 오묘한 것인가 느끼곤 한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자기 영혼을 다듬어가거나, 신자 한 사람이라도 더 늘리려고, 냉담 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회두시키려고... 밤낮으로 동분서주하는 구역 반장들, 레지오 마리에 단원들의 그 충성심을 지켜볼 때도 그러하다.
오늘도 다시 결심해 본다. 신자들이 사제인 나에게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는 것... 몇 가지만이라도 내 것이 되도록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열심한 우리 신부님' '자상한 우리 신부님' '겸손한 우리 신부님'
이 중에 단 한 가지만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 살 수만 있다면......,
- [치마 입은 남자의 행복] 중에서 / 최재용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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