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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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순 | 작성일2008-12-23 | 조회수49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오늘의 묵상입니다.(대림 제4주간 화요일) <요한 세례자의 탄생>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복음서는 즈카르야와 마리아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즈카르야는 성직자의 직분을 가진 사제로, 마리아는 나사렛 촌 동네의 시골 처녀로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으며, 또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는 벙어리로 만들었고 마리아에게는 '마리아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 주는 등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이유는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이렇게 반문하였다하여 말을 못하는 벙어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즈카르야처럼 반문하지 않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바로 답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도 즈카르야가 반문한 것처럼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며 똑같이 반문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천사는 마리아에게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으며 즈카르야에게는 한마디 설명도 없이 말을 못하는 벙어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은 가설을 증명하는 과학서적이 아니며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역사서적도 아니므로 성경이 시사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여 올바른 신앙관을 정립하여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성경은 오류가 없는 과학서처럼, 객관적 사실을 기록한 역사서처럼 모든 내용을 사실로 인식하지 않으면 신앙생활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벽안시하고 있는 점입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경전도 더 나아가 역사서 마저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인식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유럽을 여행하며 가장 놀랐던 것은 유럽의 교회는 역사의 유물처럼 황량한 모습으로 이미 변해버린 사실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지금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가 중세처럼 삶의 중심이 되고 생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면 자진하여 교회의 보호를 받으려 하겠지만 현대 사회는 중세와는 다르므로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가르침은 그대로 믿고 따를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성경의 해석은 오늘을 살아가는 가르침이 되도록 오늘의 언어로 이를 다시 재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즈카르야는 성직자 신분인 사제이므로 그에게 말을 못하게 벙어리로 만든 것은 성직 수행을 그만하라는 천형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생각하시기에는 당시 성직자들은 전혀 엉뚱한 것을 가르치고 민중들에게 잘못된 율법을 강요하고 있으므로 더는 민중들을 가르치지 말고 묵언 수행을 통해서 다시 배워서 깨달아라!는 뜻이 숨어 있는 것으로, 마리아는 나사렛 시골 처녀입니다. 시골 처녀는 순진무구함 그 자체입니다. 순박하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삶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비록 배운 것이 없어 성직자처럼 유식하지는 못하지만 자연 속에서 살아가며 자비로운 하느님을 어느 성직자보다 더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천사에게 반문하였다 하더라도 반신반의하며 물어 보는 것과 순진무구하여 물어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세례 요한이 태어난 날에 말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말문이 열렸습니다. 즈카르야는 10개월 동안을 묵언 수행을 하며 '자신에게 아들을 점지해 준 사실을 통해' 하느님은 자비롭고 완전하신 분임을 새롭게 알았으므로 자비롭고 완전하신 하느님만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을 것입니다. 그 징표로서 아들의 이름을 천사가 알려준 데로 요한으로 정하였습니다. 즈카르야가 아들 이름을 요한으로 부르도록 결정한 것은 참 하느님을 따르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교육을 받고 자란 아기 요한은 세례 요한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참된 가르침 속에서 참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즈카르야에게 묵언 수행토록 하여 아기 요한을 세례 요한으로 성장시키도록 미리미리 준비하신 완전하신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마음을 꼭 닮았지만 때 묻지 않은 삶을 살았기에 세파의 힘든 고난을 모르고 자랐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성장시키 위해서는 마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세파의 고난을 극복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그 무엇보다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한 마리아의 고난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힘들더라도 이를 극복하는 것이 정녕 아빠 하느님의 뜻일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새 날을 맞이하여 주님의 가르침을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는 무한한 은총에 감사드리며 제 염원을 아빠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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