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무명의 순교자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26 조회수588 추천수2 반대(0) 신고
우리 주위에는 특별히 자신의 심정을 남에게 표현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들을 쉬지 못하게 하고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게 하는 에로스 안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독특하게 보이려 하고,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을 알려지게 하고 인식되게 하고 이해시키려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 가면서 또 서로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자기 자신을 알리려고 하고 되도록이면 많은 체험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깊이 명상하지 않고,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보지도 않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은 항상 쉬지 못하고 좌절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보통 너무 지나치게 경쟁적인 사람이나 쓰라림을 맛본 사람인 경우에 그러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을 숨김없이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우리들은 삶의 목적도 모르는 채,
남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無名)으로 좌절하고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삶은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그리고 꿈꾸는 것보다 항상 적게 준다.
결국 어디에 살든지 간에 한 작은 마을에서 아주 평범하게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누구나 한 순간의 만족할 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다 만족스런 시간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또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좌절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누구나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어하고, 우아한 발레리나가 되고 싶고,
각광 받는 운동선수가 되고 싶고, 영화배우가 되고 싶고, 표지 모델이 되고 싶고,
유명한 학자가 되고 싶고, 노벨 수상자가 되고 싶고,
이른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만
결국 우리는 무명의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유명인사의 사인을 모으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비록 만족하고 살지는 못할지언정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살고 있지만
이러한 의미의 무명(無名) 때문에 거의 만족을 하지 못하고,
편안하지 못하고,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하고,
인정 받고 싶어하고, 귀족과 같이 돋보이고 부유하기를 바라는 욕망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 이를 성취하지 못하고 헛되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보아
귀하게 살고 독특하게 살고 부유하게 살았던 사람들조차도 결국 헛되이 죽어 갔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비록 무명으로 죽었던 사람들의 죽음도 순교이다.
“예술은 침묵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순교를 요구한다.”고
영국의 여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머독(Iris Murdoch)이 말했다.
스스로 택했던 환경 때문에 어쩔수 없이 표현하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죽음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모든 죽음에는 부활의(paschal)의 죽음이 있고 종말의(terminal)의 죽음이 있다.
죽음을 단지 피할 수 없는 것으로만 받아들이게 되면
쓰라림만 맛보게 되고 망가진 영혼만 덩그렇게 남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와 연관시켜 보면,
또는 그리스도의 공생활 이전의 삶으로 들어가는 기회로 본다면,
평안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며
경쟁적이지 않고 화를 내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된다.
 
오늘날에는 이렇게 무명으로 순교하면서 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항상 순교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려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내어 놓는 방식도 여러 가지이다.
 
초기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예수님과 당신의 제자들이 박해를 당할 때에는
순교는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했다.
영원히 하느님과 이웃들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하여
속세의 삶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렇게 포기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공생활 이전의 삶을 살았다.
세계의 여러 곳에서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형태의 순교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북미나 서구의 경우에는 다른 형태의 순교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을 다른 방식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이다.
풍요와 레저가 사람들을 정신적인 고열(高熱)에 들뜨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의 문화는 대인관계, 성(性), 예술적 체육
그리고 과학적인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 살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표현을 하고 사는데 초점을 맞추게 한다.
즉 자기 목소리를 내고 살라고 한다.
모든 일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죽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 죽음은 부활적인 죽음을 뜻한다.
 
복음(福音)을 팔면서
(非) 창조적이고, 융통성이 없고, 무감각하고 금욕적으로 살면 안 된다.
대신 복음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공생활 이전의 삶을 살면서
우리들을 무자비하게 만드는 에로스를 제대로 이용하여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고
비록 가슴 아파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고 쉬지 못할지언정
불안해 하지 않고 불행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무명의 순교를 하면서 살 때에만 삶에 만족할 수 있게 된다.
토마스 머튼은 몇 년 간의 은둔 생활을 한 뒤
“정상적인 인간의 기분으로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점차 프로그램과 같이 꽉 짜여 있는 일들과
교활한 생각을 잊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술회하였다.
 
자포자기하여 그럭저럭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무명의 순교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공생활 이전의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꿈을 희생시키는 것보다 삶을 희생시키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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