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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50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27 조회수572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8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이어서 오늘 요한 사도가 등장하는 복음이 선정된 것 같습니다. 요한 사도가 요한 복음서를 기술하였다는 뜻으로 오늘 축일에 '복음사가'의 수식어가 추가가 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요한 복음서를 요한 사도가 기술하였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다른 듯합니다.

어제와 오늘 묵상은 사실 정신이 없습니다. 대림시기를 거쳐 성탄 묵상을 하다가 갑자기 어제는 박해를 묵상하고 오늘은 부활을 묵상해야 하므로 빠른 변화에 미처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 묵상에 있어서 늘 명심하고 있는 주옥같은 말씀을 먼저 소개해 드리고 오늘 묵상을 풀어가려고 합니다. 복음서를 공부하며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모든 경전은 이성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내용은 이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가에 대하여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민중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복음서를 접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글을 읽을 수 있는 식자들이고 복음서 기자는 이들을 1차 독자층으로 하여 복음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이적에 대하여는 당시 식자층인 독자들은 이를 받아 드리고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탄생, 치유, 부활 등 이런 신화적인 내용들은 받아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들과 왜 다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식자들은 그리스 철학에 심취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정신적으로는 지금 저보다는 훨씬 앞선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를 이끌어 왔던 교부들은 특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교부들은 대단한 지식인들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와 버금가는 교부로 평가받고 있는 오르게네스 교부는 비록 후대에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엄청난 저술을 한 분으로 대단한 지식을 소유한 분이었습니다. 지금의 교리가 확정되기 이전인 3세기에 오르게네스 교부는 성경에 기록된 이적 등에 대하여는 이미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이야기 구성상의 모순,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상황은 모두가 고의로 그렇게 꾸며진 것이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너무 오래 저차원적인, 문자 그대로의 해석에 매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이야기가 철두철미하게 우아하고 일관성이 있다는 게 명백하면, 우리는 명백한 의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성서에 함축되어 있다고 믿지 않게 될 것이다."

저는 이보다 더 명쾌한 해설을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고 신화 등을 기록하였는데 오히려 문자에 얽매여서 헤매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인 부활을 실제 그대로 믿는 것은 삶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종교의 참 뜻을 잊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종교는 무슨 초자연적인 신비도 아니며 우리 일상생활과 격리된 세상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종교는 우리 삶의 현실적인 문제와 늘 연계되어 있어야 하고 현실도피적인 그런 가르침이 되어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영과 육의 이원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육은 한시적인 것이므로 쓸모가 없고 영은 영원한 것이므로 육의 삶을 영의 삶으로 변화시키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삶을 사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시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을 따르자는 것입니다.

무덤은 죽은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육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영은 결코 무덤에 묻힐 수 없음으로 죽음의 무덤에서 나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몸나와 얼나가 함께 하시다가 몸나를 완전히 죽이고 난 후에 비로소 완전한 얼나가 되시어 자유자재 하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은 몸나를 완전히 버렸다는 뜻으로 숨을 거두는 바로 그때야 비로소 “다 이루어졌다.” (요한 19, 30) 하였습니다. 우리도 '아마포와 수건 등' 버릴 것은 모두 어두운 무덤 속에 묻어두고 얼나로 광명의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기를 소망하는 그러한 신앙인이 되어야 함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다석 유 영모 선생님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나는 참나가 아니고 하느님이 보낸 얼나가 참나다. 그래서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 18, 36) 했다.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로 우주 안팎으로 충만한 호연지기의 나이다. 그러므로 지강지대(至剛至大)하여 아무도 헤아릴 수 없고 무엇에도 견줄 수 없다" 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몸나를 완전히 죽여서 영원한 얼나로 부활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으로 생각합니다.. 영원한 얼나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칠 죄인 '교만, 인색, 음란, 분노, 질투, 탐욕, 태만'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할 것을 다짐하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죽음의 무덤에서 나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사랑의 실천으로 몸나를 죽여서 영원한 얼나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칠 죄의 유혹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언제나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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