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도 요한 축일 - 윤경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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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08-12-27 | 조회수616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사도 요한 축일 - 윤경재
주간 첫날 이른 아침, 마리아 막달레나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2-8)
먼저 요한 본명을 지닌 형제님들께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사도 요한은 열두 제자 중에 나이가 제일 어렸고 심성이 겸손하고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스승 예수님에게서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도 자식을 키우다 보면 특별히 애정이 더 가는 자식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해 보살핌을 더 주어야 하는 아이이거나 부모에게 살갑게 구는 자식일 때 더 손길이 갑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사랑을 받아들일 만한 그릇의 크기가 넉넉하다는 점입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사랑을 이끌어 내어 사랑을 주고받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만한 태도가 온몸에서 흘러나옵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달려간 것도 주님을 사랑한 마음 덕분이며, 또 빈 무덤을 살펴보고 확인 했지만, 감히 먼저 들어가려하지 않고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양보한 미덕은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어려운 처신입니다. 사소한 듯 보이는 이 장면 덕분에 요한복음서가 사도요한에게 직접 연결됐다는 진정성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복음서저자는 베드로에게 적용한 ‘보았다’는 동사와 요한이 ‘보고 믿었다.’에 적용한 동사를 다르게 썼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보다 단어 선택을 아주 신중히 하였습니다. 비교적 적은 수의 단어를 썼음에도 그 뜻은 매우 깊고 풍부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찾아내려 애써야 저자의 숨은 의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적용한 동사 ‘테오레인’은 ‘구경하다. 관람하다.’의 뉘앙스가 담겨 있고, 요한에게 적용한 ‘호라오’ 동사는 ‘통찰하다’의 뉘앙스가 담겼습니다. 즉 믿음을 일으킬 만큼 한눈에 보고 깨닫는 시각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을 선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리더십, 사도 바오로의 행동력, 야고보와 같은 경건함과 포용력,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믿음 그리고 사도 요한의 영성적 저술이 각기 힘을 발휘합니다. 특히 요한은 그의 저술 속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직접 천명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는데 큰 근거를 제공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께 받은 사랑 덕분에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체험에서 우러나온 선언을 분명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요1서 4,12) 요한은 사랑의 완성이 우리에게 달렸다고 말하여 우리에게 자부심을 부어줍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사랑하는 능력이 가장 하느님을 가까이 닮은 행동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묘하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오직 사랑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요1 4,18) 한 죄녀가 바리사이가 베푼 만찬에 갑자기 쳐들어와 예수님 발에다 향유를 붓고 눈물로 적신 머리칼로 씻어준 사건은 바로 두려움을 떨쳐낸 사랑의 행동이었습니다. 어떻게 감히 창녀의 몸으로 바리사이의 집에 쳐들어갈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평소 같으면 쫓겨나서 돌멩이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뵙고 자신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죄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누구도 자기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누구를 사랑할 자격조차 없다고 여겼습니다. 또 율법과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고 사랑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닮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타인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죄녀는 예수님이라면 자기 사랑을 받아 주실 분이라고 확신하고 모든 두려움을 잊은 채 자신의 사랑을 전부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녀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받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줄 아는데 실은 사랑하지 못 하는 장벽이 인간을 더 소외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아들인 사랑으로 죄녀는 새로운 인간이 되었습니다. 가장 더러웠다고 생각되던 여인이 가장 고결한 행동을 하는 여인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사랑의 정신을 특히 강조하여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올바로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막연히 종교적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분으로 더 가까이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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