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5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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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순 | 작성일2008-12-29 | 조회수564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오늘의 묵상입니다.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성가정 축일' 복음과 동일한 복음이므로 어제 저희 본당 신부님의 강론 말씀을 소개해 드리고 오늘 묵상을 시작하겠습니다. 강론 말씀을 하시기 전에 '성 가정' 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였습니다. 몇 몇 교우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럼 '성 가정'이 아닌 분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여 또 몇 몇 교우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하신 말씀은 '남편이 이번에 영세를 받아 성 가족이 되었다'는 얘기를 하는 분이 가끔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 강론 말씀은 가족 모두가 가톨릭 신앙을 가졌다고 ‘성 가정’이 아니라 가족 간에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가정이 바로 ‘성 가정’ 이라 하였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가정에 한정시키지 말고 우리 이웃으로, 우리 사회로 넓혀 나가는 것이 우리 신앙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 간의 화목이 먼저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정결예식과 봉헌예식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정결예식은 산모를 정결하게 하는 예식으로 사내아이를 출산하면 40일이 되는 날에, 여자아이를 출산하면 80일이 되는 날에 정결예식을 하도록 율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레위 12,2-5). 이런 율법은 본받을 점이 많은 율법입니다. 안식일은 노예와 종들을 위한 휴식제도이고 정결례는 산후조리를 위한 산모의 휴식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여자아이를 출산한 경우에는 산후조리 기간을 배로 늘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남아 선호사상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남아 선호사상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당시는 남아 선호사상이 심한 시대였으므로 남자아이를 출산하면 맘 편하게 산후조리를 하였겠지만 여자아이를 출산하면 산후 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노동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폐단을 없애고 산모를 보호하기 위하여 여자아이를 출산하면 오히려 더 많이 산후조리를 하도록 율법으로 정한 것 같습니다. 이런 배려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일 것입니다. 봉헌예식은 출생 후 며칠이 지나서 봉헌해야 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최소한 30일은 지나야 봉헌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민수 18,16). 당시는 유아 사망 율이 높은 시대였으므로 최소한 30일은 지나야 태어난 아이가 건강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주님께 봉헌하는 것은 맏 아들뿐만 아니라 가축들의 맏배도 모두 봉헌해야 합니다. 사람의 맏배는 은 다섯 세겔로 대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민수18,15). 아마 사람의 맏배를 모두 봉헌 받으면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넘치고 넘쳐나서 사회가 제대로 유지될 수 없으므로 대속토록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이런 봉헌예식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할 때에 파라오의 맏배를 모두 죽여서 종살이에서 풀려난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탈출 13, 14-15). 이는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중 가장 큰 은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 땅에 태어났으므로 죽을 때까지 그 은총만큼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시메온에게 머물러 계신 이유는 바로 의롭고 독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의롭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독실한 사람과 함께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義는 내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의로운 생각만 있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새롭게 묵상하고 있습니다. 요셉도 의로운 사람이었으며(마태 1,19), 즈카르야와 엘리사벳도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루카 1, 6)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때까지는 성령이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성령이 함께한 것은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칭송하였을 때에, 즈카르야가 '즈카르야 노래'를 불렀을 때에, 이렇게 행동으로 옮겼을 때에 성령이 함께 하였습니다.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죽은 양심입니다. 행동하는 양심만이 참된 양심입니다. 행동하는 참된 양심을 가져야만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므로 행동은 하지 않고 주님만을 찬미한다고 성령은 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몰라도 의로운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전에 살았던 우리 조상님들은 YHWH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던 조상님들이었습니다. 의로움을 행동으로 옮긴 조상님들은 모든 분들이 성령과 함께 한 분이시므로 지금도 그 얼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또한 그 분들 모두 천당에서 영생을 누리고 계실 것입니다. YHWH 하느님을 믿지 않았으므로 그 분들이 모두 지옥이나 연옥에 계신다고 어느 누구도 말하지 못 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의로움의 실천만이 성령과 함께 하는 길' 임을 알 수 있으므로 우리 신앙은 이런 사실을, 즉 의로움을 알려주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데 있다 할 것입니다. 오늘 시메온은 성령이 가득하여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은 계시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계시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한 계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공평하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차별이 없는 아주 공평하신 분이시므로 절대로 특정한 사람에게만 특정한 계시를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시를 실천하는 것임을 오늘에야 새롭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 생각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줄 알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침묵하고, 불의한 줄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동조하고, 잘못되었는지 알면서도 침묵하고 동조하는 등 이러한 우리의 잘못 등으로 인하여 우리 사회 곳곳에 불의와 왜곡된 현상들이 판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시한 것은 불의한 것은 불의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 가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죽이고 또 죽여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음을,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계시해 주셨음을 감사드리며 오늘 묵상을 마무리합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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