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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52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30 조회수532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성탄 팔일 축제 내 제 6일)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6-40

그때에 36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성전에서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가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하였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한 것은 실제적 사실이거나 아니면 유대인들에게는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있어야 유효하였으므로 (신명 19,15) 예언의 신빙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두 사람의 예언자를 등장시킨 것 같습니다.

한나 예언자의 예언은 시메온이 하였던 예언의 신빙성을 증명하려는 의도였다면 시메온의 예언과 거의 동일하였으리라 생각하므로 반복을 피하기 위하여 한나 예언자의 예언은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속량은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므로 모든 압박과 굴레에서 해방을 맞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전적인 의미로 해석하기 보다는  '마리아 노래' (루카 1,46-56)를 통하여 속량을 이미 밝히고 있으므로 '마리아 노래'의 주요 부분을 다시 옮겨 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속량을 생각하면 동학을 창시한 수은 최제우 선생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은 선생님은 여종 둘을 모두 속량시켜서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고 한 사람은 조카딸로 삼았습니다. 수은 선생님의 이런 속량은 당시 이 땅에 전래된 우리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실제로 동학은 우리 교의 장점만을 취합하여 재해석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학의 핵심사상인 시천주(侍天主)사상과 인내천(人乃天)사상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사상이라 할 것입니다. 한울님을 섬기는 侍天主사상은 ‘한울님을 기를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한울님을 모실 줄 안다’고 하는 양천주(養天主)사상으로 2대 교주인 해월 선생님께서는 한단계 더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우리 교회가 늘 강조하는 하느님과 함께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해월선생님은 한울님과 사람의 관계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확대하여 사람을 하늘처럼 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인 인내천(人乃天)사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事人如天은 예수님의 유일한 계명인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8, 15)하신 계명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마태 7,12)하신 황금율처럼 타인을 배려하는 지극한 마음입니다. 

해월선생님의 이런 선각자적인 가르침은 수운 선생님의 제사를 지낼 적에 제사 방식의 일대 혁명을 단행하였습니다. 벽을 향해 음식을 차리고 멧밥과 신위를 벽 아래 놓고 절하고 비는 '향벽설위(向壁設位)'의 제사방식을 벽 쪽에 있던 멧밥과 신위를 제주(祭主)앞에다 갖다 놓고 절하고 비는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제사방식으로 바꿨습니다.

벽 쪽에 있는 신위와 밥그릇의 위치를 내 앞으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였지만 이는 나의 건너 쪽에 타인, 조상, 부모 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쪽에, 즉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의 미사방식도 불과 몇 십 년전 까지는 교우들은 신부님의 등을 보고 미사를 드렸습니다. 미사방식의 대 변화는 이천년 가까이 이어온 전통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사고의 대 전환으로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지만 이런 발상을 해월 선생님이 앞서 하였으니 우리 조상님들의 선각자적인 지혜는 역시 존경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저희를 하느님의 종에서 속량시켜서 하느님의 자녀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주님의 종이라는 당시 유대 민중의 사고에 아직껏 머물러 있습니다. 타율적인 주종의 관계보다는 부자유친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느낄 수 있고 형제애를 더욱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제 아버님과 어머님을 이 몸 다할 때까지 잊지 않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아빠 하느님을 불러봅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속량시켜 주시고
주님을 아빠로 부르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를 저희 모두가 하루빨리 깨닫기를
저희 모두들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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