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구체적인 사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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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현아 | 작성일2008-12-31 | 조회수677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천주의 모친 성모 대축일 - 구체적인 사랑 비가 많이 내리던 날 한 자매님이 비에 젖어 저와 상담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집무실에 들어가 상담을 하는데 자신 안에는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길을 지나는데 마귀가 이 성당에 들어가 보좌신부와 상담을 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분의 거주지를 잘못 말했더니 그 분의 얼굴과 목소리가 갑자기 무섭게 변하면서 자신이 언제 그 곳에 산다고 했냐고 겁을 주는 것입니다. 비도 오고 작은 방에 둘이 있는데 그렇게 변하는 모습을 보니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러나 겁먹은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되었기에 오히려 제가 야단을 쳤습니다. “자매님은 한 번 들은 걸 다 기억하세요?” 그랬더니 다시 수그러들었습니다. 제 예상대로 그 자매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이 있었지만 하느님과 만나지 못하고 그러다 결혼도 못 하고 마흔이 다 되었습니다. 보험 설계사를 하고 돈도 어느 정도 번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그 자매는 남자와 온전한 관계를 한 번도 맺은 적이 없었습니다. 또 그 자매는 마귀와 밤에 몇 번 육체적인 관계를 맺은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모르지만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한 노처녀의 외로운 삶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온전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것들과도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인간의 구조가 관계를 맺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남자만으로 혹은 여자만으로는 온전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게 될 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 안에서 관계를 맺어 한 몸이 되어야만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본성이 사랑이시고 사랑은 혼자 할 수 없기에 하느님도 본성상 그분 안에서 관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들도 하나 되는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서부터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기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내가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데 사실은 방해가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되도록 삼가고 내 안에서 주님과 만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 정말 꽃과 나무와 이야기도 나눌 정도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잘못 가고 있었습니다. 자연이 나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내가 하느님은 물론 인간과도 온전한 관계를 이루고 있지 못했기에 발생하는 현상이었습니다. 즉, 내 자신이 내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위의 자매가 마귀와 관계를 맺게 된 것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분열되어 외로움을 극복해보려는 몸부림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주님과 일치하려고 기도만 하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우리 천주교 전통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관계보다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전통이 있어서 성인들의 성화를 보더라도 사람과 있는 장면보다는 홀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그림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먼저 완성하고 그 다음에 인간관계를 맺어야 옳은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구체적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는 더 불가능해 집니다. 사도 요한도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합니다. 그 이후부터는 기도의 목적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보이는 사람과 더 나은 관계를 위한 목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기도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 겹치면 기도를 포기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지금은 아빌라의 데레사가 왜 성당에만 앉아있던 자매에게 기도를 그만하도록 심부름을 시켰는지 이해가 갑니다. 오늘 천주의 모친 성모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 이유는 성자께 당신의 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몸만 주었는데 왜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를까요? 예수의 어머니, 혹은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될 수 있을 지라도 하느님을 나으신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치 벽돌처럼 신성과 인성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더 이상 나뉠 수 없게 하나 된 분입니다. 마치 사제가 미사 때 포도주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그 물이 포도주에 섞여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하여 나뉠 수 없기 때문에 성모님을 단지 인성의 어머니라 불러선 안 되고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그리스도, 즉 하느님의 어머니라 불러도 틀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인간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그 인간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십니다. 인간 예수님과 성자는 다른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즉 보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신성까지도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성자를 사랑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 사랑하는 방법은 역사적으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구체적인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하느님을 찬미하고 오래 기도하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는지 성경부터 읽고 묵상하고 배우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의 인성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결국엔 신성까지 사랑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추상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이라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예수님만 찬미하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도 오랜 시간 예수님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한 거지가 ‘목마르다!’하는 모습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항상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을 먼저 사랑한다고 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왔다고 하시면서도 특별히 어머니, 요셉, 열두 사도, 그 중에서도 세 명, 칠십이 제자, 여자들 몇몇, 부활하셔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시는 등 다만 얼마 안 되는 사람들과만 구체적인 관계를 맺고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또 그 구체적인 관계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즉, 어머니는 예수님께서 천상에 가셔서도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체적인 관계와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이것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소홀하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구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피자처럼 나뉘는 것이 아니라 빛처럼 퍼지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곧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꽃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꽃을 사랑한다고 하느님을 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름다운 꽃을 통해서 그 꽃에게 생명과 아름다움을 넣어주신 온전한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을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올바른 관계와 올바른 사랑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입니다. 처음부터 성체를 영하면서 그 분과 하나 되는 행복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구체적인 관계로부터 사랑과 일치의 신비를 알아간다면 그리스도와의 일치도 더욱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천주의 모친 대축일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음이 신학적으로 결정된 날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중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란 뜻입니다. 즉, 인간관계 안에서의 구체적인 사랑이 영원한 사랑으로 가는 길이란 뜻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지만 사랑은 환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남자와 여자, 가족, 친구,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새 해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사랑하도록 결심합시다. 한 사람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면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또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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