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을 만나는 체험의 본보기 - 윤경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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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09-01-03 | 조회수565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주님을 만나는 체험의 본보기 - 윤경재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요한 1,29-34)
요한복음서를 흔히 영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예수와 첫 만남부터 성령에 눈뜬 사람이 등장하고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고 부르시며 늘 성령의 작용을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을 여러 번 언급했기에 새로운 관점에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유대 백성에게 물로 세례를 주며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스스로 부족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지닌 한계를 분명하게 자각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메시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며, 그 예언자도 아닌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거짓 증언할 수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면서 늘 묵상을 하였습니다. 자기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때는 전혀 들리지 않아 어둠 속을 헤매었습니다. 그는 이 과정이 하느님께서 자신을 단련시키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더욱 매달렸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성령을 만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성령이 내려와 머무르는 분을 만나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 온 세상에 알려라하는 명령을 듣습니다. 요한은 아직 성령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자각을 통해 광야에 나와 자신의 내면을 살폈지만 그는 아직은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적 성찰이나 관상을 통해 어떤 깨달음에 도달할 수는 있습니다. 또 그런 것을 강조하는 종교나 신비주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못하면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새로운 존재양식에 따라 살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을 통감하고 가난 속에서도 사랑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체험은 자격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남녀노소 빈부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만날 수 있으며, 또 지성과 자기 성찰을 통해서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성령에 대한 갈망뿐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처럼 기도하며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자 스스로 어린양이 되셨구나! 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뵙자마자 온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부족을 깨달은 자만이 내 뱉을 수 있는 외침입니다. 그랬기에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는 칭찬을 예수께 받았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편지에서 ‘어둠의 고백’을 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 깨달았기에 나온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은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간해서는 자기체험을 떠들지 못하고 남몰래 숨어서 가난과 순명과 정결의 덕을 쌓으려 시도합니다. 실제로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빈 수레들만 요란하게 나섭니다. 그들은 자신이 겪은 심리적 체험을 성령 체험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성령을 지닌 분이신 예수님을 뵙고서 사람들에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요한 3,30절에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모습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참된 성령을 체험한 자는 언제나 기도로서 가난과 순명과 정결을 따를 것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그의 고백은 새로운 죄를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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