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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어린양'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03 조회수476 추천수3 반대(0) 신고
 <하느님의 어린양>(요한1,29-34)

 -유 광수신부-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그냥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자문해 보게 된다.
요한은 "세상의 죄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지 않고 "세상의 죄를"이라고 단수로 말하였다.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의 죄란 이런 저런 여러 가지들이 아니라 모든 죄의 뿌리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죄이다. 율법학자들이 중풍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셨을 때 "이 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2,7)라고 말하였듯이 하느님을 보고 이야기하면서도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저런 많은 죄들을 짖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을 안다면 언제든지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요한 세례자는 우리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외친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무지함"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죄의 뿌리를 아예 없애버리러 오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죄의 일부분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조의 뿌리가 되는 "세상의 죄"를 용서해주러 오신 분이시다.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이시다."라고 하지 않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분이 이제 오시는 것처럼 말을 한다. 그러니까 요한은 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그분이 저기 오신다는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분을 맞이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맞이한다. 나는 평소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느님을 기다리고 있는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늘 하고 있는가? 내가 평소에 아무런 하느님에 대한 생각없이 또는 아무런 기다림도 없이 생활하고 있다면 하느님이 오신다고 하더라도 알아볼 수 있겠는가? 또 내가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 있어야 그런 하느님을 볼 때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을 기다리는 마음도 없고 또 내가 바라는 구체적인 하느님의 모습도 없다면 지금 당장 하느님이 내 앞에 오신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겠는가? 요한은 절대로 예수님이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던 분이 오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분을 가리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라고 말하였다. 요한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장차 오시는 하느님은 어떤 모습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갑자기 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리고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이상한 모습으로 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미 "언제, 어떤 모습으로, 왜, 오실 것"이라는 것을 예언자를 통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이사 40 3-5)고 당신이 오신다는 것을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53, 6-7)라고 오실 하느님의 모습을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다 말씀해 주셨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또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다." 이렇게 우리의 잘못으로 지은 모든 죄를 없애주고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하느님은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자식이 죄를 지으면 부모가 모든 수모를 다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요한은 인간이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짖게 되는 이 세상의 죄의 뿌리가 되는 "하느님에 무지함"을 아예 없애버리러 오신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죄를 짖지 않으려면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모르면 우리는 또 다시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 놀아난다." 그럼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는가? 하느님은 우리의 이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공부해서 아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이 직접 당신을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싶으면 직접 하느님한테 듣고 보고 배워야 한다. 요한도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라고 하셨듯이 하느님이 보여주신 것을 보았고 일러주신 대로 하였기 때문에 알게 되었고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면 죄를 짓게 하는 "하느님에 대한 무지함"에서부터 깨어나야 한다. 즉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짓게 될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며 해결책이다. 그럼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느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말씀 즉 성서를 아는 것이다. 성서는 모두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시는 내용이며 성서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 가를 알게 된다. 성서를 알게 되면 "길을 헤매며 제멋대로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으며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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