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ve them some food yourselves.
(Mk.6.37)
제1독서 요한 1서 4,7-10
복음 마르코 6,33-44
몇 년 전, 어떤 교육 때문에 한동안 전철을 타고서 서울을 매일 오고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갔다가 다시 인천으로 내려올 때이면 항상 만나는 분이 계셨지요. 그분은 몸이 많이 편찮으신 듯 힘들게 이동하시면서 전철 승객들에게 도움을 청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이면 항상 만나는 그분에게 매일 천 원씩을 드렸지요. 그분에게 이 돈이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만약에 드리지 않고 외면하면 내 마음이 더 안 좋을 것 같아서 매일 만날 때마다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요? 일주일 내내 그분을 만났는데, 똑같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분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듯 한 느낌이 들면서 오히려 불안한 것입니다. 그때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제가 더 많은 것을 얻고 있다는 것을……. 그분은 제게 행복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면서 봉사와 나눔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와 나눔을 세상의 논리로만 판단하려고 하지요. 즉, 내게 있어서 남는 것, 여분의 것만이 베풀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봉사와 나눔을 해서 잃는 것이 많다고 생각을 하게 되고, 왜 이렇게 손해 보는 짓을 할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봉사와 나눔은 이렇게 나에게 남는 물건이나 시간을 다른 이를 위해서 단순히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은총이 내려지는 통로가 바로 봉사와 나눔 안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세상에서 얻는 것과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 차원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하는 봉사와 나눔에 대해 모두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때로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특히 협조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또 냉담하면서 문도 열어 주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또한 악의를 품은 말을 건네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하느냐고, 성당에서 봉사하는 것이 할 일 없어서 그런 줄 아느냐고 자신도 할 일 많은 사람이라고 큰 소리 치지요.
그런데 정말로 얻는 것이 없을까요? 세상이 나를 몰라줘도 또 본당 신부가 그리고 본당 수녀가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께서는 알아주십니다.
이렇게 세상의 논리를 내세워서는 진정한 봉사와 나눔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논리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하느님 은총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즉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정말로 대단하지요? 예수님만 계시면 굶어죽을 일도 없고, 아니 먹는 걱정을 굳이 하면서 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기적에서 잊어버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이것이지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은 바로 우리들의 나눔과 봉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님의 기적이 나에게 저절로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기적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큰 기쁨이며, 큰 행복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쁨과 행복이 바로 나의 나눔과 봉사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데, 그 나눔과 봉사를 세상의 논리를 내세워 거부하겠습니까?
미래는 꿈의 아름다움을 믿는 사람들의 것이다.(엘리노어 루즈벨트)
마지막 기회(김원숙, ‘좋은생각’ 중에서)
며칠 전부터 오빠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홀로 칠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엄마. 그런 엄마와 싸우는 오빠에게 대들다가 나는 뺨을 맞아 오른쪽 청각을 잃었다. 결국 나는 오빠에게 등을 돌렸고 남편 따라 미국에 온 뒤로는 남이 됐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오빠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가는 동안에도 별 생각이 다 스쳤다. 이내 힘없는 오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해서 오빠는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어색한 대화가 오간 뒤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오빠가 말했다. “지금까지 너한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부디 용서해다오.” 순간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나도 잘한 것 없어요. 오빠... 목소리가 안 좋은데 건강 잘 챙기세요.”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허탈했다. 40여 년 만에 듣는 오빠의 사과가 내 마음의 상처를 다 치유할 수는 없었다. 전화한 것을 후회하는 한편 약해진 오빠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며칠 뒤 올케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고마워요. 고모한테 전화 받은 다음 날 오빠 편안하게 가셨어요. 위암으로 고생하셨거든요. 오빠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늘 고모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짧은 대화가 지상에서 오빠와 화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니, 내가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얼마든지 한쪽 귀로도 오빠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을텐데... 후회로 가슴이 미어졌다. 이미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나는 울며 말했다.
“오빠 정말 미안해. 나도 용서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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