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must increase; I must decrease.
(Jn.3.30)
제1독서 요한 1서 5,14-21
복음 요한 3,22-30
진시황릉의 병마용갱 박물관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것은 무릎을 꿇고 활을 쏘는 용사의 조각상이라고 합니다. 이 병마용은 왼쪽 다리를 꿇고 있고, 오른쪽 무릎은 땅에 닿아 있으며, 상반신은 왼쪽으로 약간 기울었는데, 형형한 눈빛은 왼쪽 전방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은 오른쪽에서 화살을 당기고 있지요.
지금까지 출토된 병마용들은 대부분이 약간씩 훼손되었기 때문에 인공적인 복원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 병마용은 완벽하게 보존되었으므로 전혀 손을 보지 않았다고 해요. 심지어 옷의 문양이나 머리카락의 결까지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을 정도이니까요.
전문가들은 무릎을 꿇은 병마용이 원래의 모습을 완벽하게 지켜온 이유가 낮은 자세 덕분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 병마용의 높이는 1.2미터로, 기립하고 있는 병마용들이 1.8~1.97미터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낮지요. 지하에 건설된 병마용갱은 천장이 무너지면 건장한 병마용들이 머리로 받치기 때문에 낮은 자세의 병마용은 덜 손상되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꿇은 자세의 병마용은 오른쪽 무릎과 두 발이 삼각형을 이루면서 몸을 지탱하고, 그 중심이 아래에 있기 때문에 상당히 안정적입니다. 당연히 두 발로 서 있는 병마용들에 비해 넘어지거나 깨질 확률이 아주 낮은 것입니다.
이렇게 무릎 꿇은 궁사 병마용의 모습은 우리의 삶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경쟁에서 이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겸손한 마음가짐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어떤 나약함이나 위축된 모습처럼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를 낮추는 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살리는 현명함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자기를 한없이 낮추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 성경말씀을 아마도 평생토록 자신의 삶 안에서 지키셨던 분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 누구도 세례자 요한을 못난 사람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일들이 헛일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겸손함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 실천하는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한 젊은 여인이 미술관에 그림을 감상하러 왔습니다. 미술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여인은 꿇어앉은 채로 그림을 감상했습니다. 미술관 직원이 그토록 힘들게 그림을 감상하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내일 학생들을 데리고 미술품을 감상하러 올 텐데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이 미술품들이 어떻게 보일지 미리 알아두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눈높이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눈높이를 낮추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우리들과 하나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느님이신 분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시어 이 땅에 오셨고 이로써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이러한 겸손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 겸손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며, 자기를 살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용기는 근육처럼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루스 고든)
적을 친구로 만들어라
한 젊은이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게 되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임산부가 맞은편에서 건너오자 그는 예의 바르게 뒤로 물러나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임신부가 다리를 건너자 젊은이는 다시 다리에 올랐는데, 중간쯤 갔을 때 나무꾼을 만났다. 청년은 다시 양보를 했다.
세 번째로 다리를 건널 때는 아무도 없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다리를 거의 다 건넜을 쯤에 갑자기 바쁘게 짐을 지고 오는 농부와 마주쳤다. 젊은이는 공손하게 농부에게 말했다.
“저는 조금만 가면 다리를 다 건너니 양보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농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면서 “젊은이는 내가 바쁘게 장에 가는 것이 보이지 않나?”라며 목청을 높였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 하는데 다리 밑의 강으로 작은 배가 지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배를 젓고 있는 스님에게 사정을 말하고 시비를 가려 달라고 청했다.
스님이 농부에게 먼저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급하게 장에 가야 합니까?” 농부가 빨리 가지 않으면 장을 놓친다고 하자 스님이 조용히 타일렀다. “그렇게 급히 가야 한다면 왜 빨리 젊은이에게 먼저 건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몇 걸음만 뒤로 물러서면 당신과 젊은이 모두 다리를 건널 수 있는데요.” 농부는 유구무언이 되었다.
스님이 청년에게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자네는 왜 이 양반에게 길을 양보하지 않았지?” 젊은이는 억울한 기분에 “벌써 몇 번이나 그랬는데 또 양보를 하면 다리를 못 건널 것입니다.”라고 볼 부은 소리를 했다.
“지금 거의 다 다리를 건너지 않았는가? 또 한 번 양보한다고 해서 큰일 날 것 같지는 않은데. 설령 다리를 못 건넌다 하더라도 최소한 자네의 선량한 마음씨는 변함이 없는 것이니 족하지 않은가?” 스님의 말씀에 청년은 얼굴을 붉혔다.
양보는 겸허함과 인내심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적시에, 적당하게 겸양의 미덕을 발휘함으로써 인간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상징하는 바에서 알 수 있듯이, 남에게 길을 양보하는 것은 사실상 자신을 위해 길을 터놓는 행동이다. 하지만 일상생활과 일에 있어 당당하게 따지고 싸워야 할지, 양보를 할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모두에게 어려운 문제이다.
한편 어떤 일을 할 때 과거에 좋지 않은 일로 다퉜던 사람으로부터 협조를 받아야만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냥 포기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다. 상대가 적처럼 여겨지더라도 친구로 만드는 것이 이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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