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탄 시기 마지막 날에 - 윤경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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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09-01-10 | 조회수657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성탄 시기 마지막 날에 - 윤경재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2-30)
논쟁을 좋아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성향인 듯합니다. 유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 본문에도 여러 번 논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대종파도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로 갈렸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신앙내용에도 차이가 컸습니다. 또 같은 율법학자라도 사안에 따라 율법을 해석하는 방향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뛰어난 스승의 문하에 따라 주장하는 정도가 갈렸습니다. 힐렐학파, 삼마이학파, 가말리엘학파 등이 온건론자, 엄격론자, 합리적 중도론자로서 서로 다르게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였습니다. 아마 요한의 제자들에게 어떤 유대인이 찾아와 질문을 했나봅니다. 선의로 그랬는지 의도를 숨기고 찾아왔는지 모르지만, 그 논쟁은 결국 말다툼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런 장면은 지금도 흔히 나타납니다. 매일 같이 벌어집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어쨌든 이 논쟁에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에게 돌아와 이런저런 질문을 했습니다. 마치 동네에서 싸움을 벌이다가 한 대 맞아서 코피 흘리며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하소연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자신을 역성들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혜로운 엄마는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는 법이라고 여기고 새로운 교육의 장으로 삼아 아이의 시각을 넓혀줍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정결례에서 시작된 논쟁에서 벗어나 이제는 세례 주는 문제로 비약했습니다. 이쪽에서 뺨맞고 저쪽에다 분풀이하는 격입니다. 이전에 요한의 문하에 속했으나 떠나간 동료들에 대해 물었습니다. 예수와 또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다니더니만, 세례자 요한의 전매특허인줄 알았던 침례의식을 수행하는데 자기네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것을 아시냐고 물었습니다. 질투와 항의가 엿보이는 질문입니다. 이에 세례자 요한은 현명한 대답을 해줍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이 한마디 말에 모든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는 시각을 지니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뜻을 내세우려는 본능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못된 본능을 없애는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묵상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기보다 자신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 적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고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의 극기 생활을 통해서 자신을 죽이는 수양을 쌓았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익혔습니다. 늘 깨어 있었습니다. 깨어 있는 자의 말은 우화나 비유로 나옵니다. 직설화법으로는 모든 내용을 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그래서 노자는 “말할 수 있는 道는 道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했습니다. 요한도 신랑과 신부의 비유로 말합니다. 자기를 신랑의 친구로 빗댑니다.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는 친구의 모습을 들어 모든 의문을 풀어줍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경구를 내려줍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커지셔야 하고 우리의 목소리는 작아져야 합니다. 오늘이 성탄시기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 주님 세례축일을 지내면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과연 우리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하고 탄생시켰는지 되물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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