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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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현아 | 작성일2009-01-10 | 조회수711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주님 세례 축일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오늘은 김수환 추기경님과 최월갑이란 한 사형수의 이야기로 먼저 시작할까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가톨릭 시보사 사장을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최월갑이란 사형수는 살인강도죄를 짓고 사형선고를 받은 젊은 사형수였습니다. 그는 개신교 신자였는데 천주교로 개종하고 싶다고 해서 추기경님이 (물론 그 때는 추기경님이 아니셨지만) 미사도 드려주고 수녀님께 부탁하여 교리도 받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기 직전에 사형대에 서야 했습니다. 그래서 추기경님은 그에게 급하게 조건부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형수는 매우 평화로웠고 오히려 밝은 햇살을 맞으러 나갈 추기경님이 울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는 천주교 묘지에 묻히게 해 달라는 유언과 함께 사형대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잠시 후 ‘쿵’하는 소리가 났고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간수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추기경님 옆에 있던 소장에게 뛰어왔습니다. “소장님, 월갑이, 월갑이가...” “왜 그래. 무슨 일인가?” “월갑이가 저 밑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어요.”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야. 죽은 사람이 웃고 있다니?” 추기경님과 소장이 현장에 가 보니 그는 정말로 밧줄을 목에 걸고 편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나무로 된 낡은 교수대가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아래로 함께 떨어진 것입니다. 소장은 즉시 ‘사형집행 계속’ 명령을 내렸습니다. 추기경님은 두 번씩이나 교수대에 서야하는 상황이 애처로워 어쩔 줄 몰라 그의 손만 꼭 잡고 있었습니다. 간수들이 사형대를 고치는 것을 태연스레 보고 있던 그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지금 죽는 것이 제게는 가장 복된 죽음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믿음이 있으면 제 말을 이해하실 거예요.”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제가 반시간쯤 후면 천당에 가 있겠네요.”라며 추기경님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편안하게 떠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는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나는 신비’를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주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죄가 없는 예수님까지도 죽음과 새로 태어남의 신비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세례의 전형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입니다. 또한 여호수아(사실상 ‘예수’와 같은 이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도 세례의 예표입니다. 세례란 이와 같이 강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바다 사이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뒤를 쫓던 이집트 군인들은 자신 안에 있는 ‘악’ 혹은 ‘나쁜 경향들’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죄의 종살이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로 태어나고 죄의 경향들은 바다 속에 묻히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그들에겐 나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경향들은 이미 홍해 사건과 사십년 동안 사막을 걸어오면서 모두 죽었고 이미 새로 태어난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완전한 인간일지라도 하느님 앞에서 낮아지고 자신을 비우는 모습은 ‘사랑의 본질’이기에 꼭 죄나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 안에서 항상 새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셨지만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죽이시고 온전히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죄 사함을 받을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랑’한다면 ‘세례’를 통한 새로 태어남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번만이 아니라 ‘내가 받을 세례가 따로 있다.’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죽이고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의 의미를 알았다면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뜻을 죽이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름으로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물은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우리의 작업을 의미하고 ‘회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예수님께도 성령님이 내려오시면서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는 이렇게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즉, 세례를 받는 입장에서는 자신을 죽이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고,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당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시며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한 수녀님께 세례에 대해 말씀해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수녀원에 들어와서 못난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해 주심을 느꼈어요. 그래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죠. 이것이 세례 같아요.” 그렇습니다. 세례는 한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새로 태어남입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났다는 증거는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구나!’를 느꼈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 순간에 또 한 번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한 사제에게도 세례에 대해 말해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고해성사를 볼 때 세례를 다시 받는 것 같아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새로 태어남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고해하는 작업은 홍해를 건너는 일과 같습니다. 나쁜 것들을 바다에 남겨놓고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용서해주시고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시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끼면 그것도 역시 작은 세례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저도 신학교 들어갔을 때 교만하여 주님께서 불러주신 것에 대해 만족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틀 정도를 굶고 나서 성체를 영하는데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틀을 굶어보니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보잘 것 없는 나를 불러주신 것에 대해 한없이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세례 같았습니다. 세례는 결국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 행복에 위의 사형수처럼 죽음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죽음도 이길 수 없는 힘을 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일상에서도 이런 끊임없는 새로 태어남이 없다면 삶을 살아갈 힘을 얻기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낀다면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그 사랑의 에너지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낮추는 이들에게 이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해 주십니다. 그런 힘을 얻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자주 자신을 돌아보며 ‘안 좋은 경향들을 죽여 가는 작업(회개)’일 것입니다.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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