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맹인 선교회 식구들과 만날 때였다. 겨울에 차가운 방에서 예비자 교리도 하고 함께 병원 방문도 하며 기쁘게 지내던 중 한 사람을 통해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체험을 했다. 내가 상대방의 자립을 바라지 않고 나에게 의존하기를 바라며 만나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내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자 나는 몹시 비참했고 슬펐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 믿으며 살아온 내 존재가 흔들리며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 감사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나에게 첫 회개의 순간이라 느껴진다. 내가 이상적이라고 굳게 믿었던 삶의 방식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시고 나를 거짓된 강박관념에서 풀려나게 해주신,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동기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신 은총의 시간이었다.
지금도 내가 느끼기에 버거운 일이 닥칠 때면 나는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을 믿고 ‘예.’`할 것인가, 부족한 내 능력을 생각하고 편하게 살고 싶은 본성에 따라 ‘아니오.’ 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서 갈등한다. 나를 바라보는 눈을 들어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께 온전히 맡겨드리며 ‘예.’`하는 데 믿음과 용기가 필요함을 느낀다.
내가 걸어온 길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때로 가장 깊은 어둠과 두려움 가까이에 있었다. 그 너머를 보게 해주시고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은 늘 가까이 계셨다. 그러기에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도 감사하다. 당신께서 더 진실한 그릇으로 빚기 위해 인도하시는 것임을 늘 뒤늦게 깨닫지만….
조정희 수녀(사랑의 씨튼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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