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보아라 / 요한1,35-42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두 제자를 보시고"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셨다. 인생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고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찾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에게 찾는 것이 없다면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죽은 인간만이 찾지 않는다. 찾는다는 것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고 배고픈 사람은 먹을 것을 찾고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은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다. 인간은 찾고, 찾은 것을 얻고, 기뻐하고 또 싫증을 느끼고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을 다른 것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고 있다. 언제 인간의 이 방황이 멈추게 되는가? 인간의 영원한 욕망을 채워 줄 하느님을 만날 때까지이다. 왜 그렇게 하느님을 찾는가? 하느님을 찾았을 때 비로소 인간이 안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인간은 하느님을 찾는가? 인간은 하느님한테 왔기 때문이다. 마치 연어가 죽을 때에는 자기가 태어났던 곳을 다시 찾아가듯이 하느님한테서 왔다 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이것을 귀소 본능이라고 한다. 하느님을 찾고 있는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기까지 걸어 가야할 여정이 영성생활이다. 일단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더 이상 찾아 나서지 않고 안식과 기쁨 충만함을 느끼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즉 찾아 헤매는 방황이 멈추어지고 "그 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라고 한 것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럼, 어디에서 찾아야 이런 기쁨과 충만함을 누리며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의 불행은 그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는 데에서 절망과 방황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을 찾아 나선 이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와서 보아라"고. 즉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예수님은 "와서 즉 당신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신다. 우리가 찾아야 할 곳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오늘 우리에게서 예수님은 말씀이다. 즉 우리가 찾아야 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에서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이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라고 말한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말씀"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 않고, 하느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찾고자 하는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여기 저기 다니고 무엇을 보러 가고, 누구를 만나려 가고, 이리저리 찾아 헤맨다.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해답을 찾느라고 얼마나 많은 시간, 돈, 정력 등을 소모하는가? 그래서 지치고 피곤하고 시간에 쫓기고 늘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사람은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찾아지는 것도 달라진다. 늘 돈을 찾는 사람은 결국 돈은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차지 못한다. 권력을 찾는 사람은 마침내 어떻게 해서라도 권력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얻지 못한다.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그럼 신앙인은 이 세상의 것을 전혀 찾지 말라는 말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것들도 필요하다. 다만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데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또는 하느님을 찾는데 하나의 수단이지 목표는 아니다. 수단과 목표를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것을 찾기 위해서 하느님을 포기해서도 안되고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고 해서 이 세상의 것을 전혀 도외시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도있고 하느님을 위해서 일할 수도있다. 다만 하느님을 찾는 것을 소홀히 하면서 오로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영원한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고 거기에만 매달리거나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영성생활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더 나은 것을 지향해야하고 더 나은 것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하위 것을 얻기 위해 상위 것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100원을 벌기 위해서 1000원을 버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듯이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주는 하느님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또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으려면 "와서 보아라"고 하셨듯이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로 가서 보아야 한다. 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로 가야한다. 예수님께로 간다는 것은 말씀에로 간다는 것이요, "와서 보라"는 것은 그 말씀을 통하여 보여 주는 세계를 보라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보다"라는 말은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가면 영화관만 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것이요, 감상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이 있고, 깨달은 것이 있고, 감동이 전달된다. 이처럼 "보다"는 말은 말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이요 그 안에서 하느님이 펼쳐 보여 주시는 세계를, 가치를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 제자가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 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라고 예수님과 함께 묵으면서 느꼈던 감동의 순간을 "오후 네 시쯤"이라고 기억하였듯이 우리도 보고 느끼고 감동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이 "보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 속까지를 들여다 보고 그 사람의 마음상태까지를 아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다"라는 것은 단순히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무한한 세계를 보는 것이요,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요, 복음을 통해서 보고 깨닫고 느낀 그런 눈으로 보고, 그런 느낌으로 느끼고,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가면서 다시 나를 보고 이웃을 보고 이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본다"는 것은 똑같은 사건이나 세상과 사람을 보더라도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눈으로 보고 다른 가치관으로 보고 다른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매 순간은 똑같은 순간이 아니라 늘 새로운 순간이며 새 하늘 새 땅으로 다가 올 곳이다. 그래서 더 이상 행복을 찾아 헤매지 않고 하느님이 펼쳐 보여 주시는 새로운 세계를 감상하고 즐기며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 것이다. ..........◆
말씀봉사 : 유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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