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기브 미 어 펜(Give me a Pen!)...이태석 요한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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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미 | 작성일2009-01-18 | 조회수568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기브 미 어 펜(Give me a Pen!)....이 태석 요한 신부님
8년전 여름 방학을 이용해 열흘간 여기 수단에 온 적이 있다. 말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초를 다투는 응급 상황이었다. 먹질 못해 뼈만 앙상히 남은 사람들, 손가락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른채 너무 쉽게만 살아왔던 것에 대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발가락 없이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는 나환자들, 삐쩍 마른 엄마 젖을 빨다 결국 지쳐 울어대는 아기들.. 이러한 현실이 무엇보다도 마음을 더 아프게 한 것은 다닐 학교가 없어 하루종일 나무밑에 앉아 그냥 시간을 때우던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우리 어려운 시절 가난했지만 젊은이들의 미래가 있었기에 희망을 잃지 않았던 모습과는 달리 그들의 모습에선 전혀 미래나 희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재의 모습은 무서움마저 들게했다. 그때 막 이곳에서 선교를 시작했던 제임스 신부님도 ‘교육은 이곳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다’며 급한대로 70여명의 학생을 데리고 나무 그늘 밑에서 학교를 시작했다. 최고 학년이 초등학교 3학년에 불과했지만 학생들의 평균나이는 열여덟 살 정도였다. 일 년 뒤엔 대나무와 흙으로 작은 움막들을 만들어 교실로 쓰기 시작했는데 책상은 없었지만 Y자 형태의 두 개의 나무 사이에 얹힌 긴 통나무 의자가 제법 교실다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처음으로 수업이라는 것을 받아보는 아이들의 눈은 설렘과 호기심에 너무나도 반짝거렸다. 교과서는 물론이고 공책이 부족해 흙바닥에 나뭇가지나 손가락으로 영어 단어를 써가고 수학 문제를 푸는 아이들을 보며 다 쓰지도 않은 멀쩡한 문구류들을 마구 버리는 우리의 지나친 소비 문화가 분명히 ‘죄’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전 보름달이 너무나 아름다워 마을로 산책을 나간 적이 있었다. 집밖에 나와있던 많은 아이들이 인사를 해왔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공책이나 책을 무릎에 펴 놓고 그것들을 읽고 있었다. 전기가 없던 집 안에선 공부를 하지 못하고 달빛을 이용해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빛으로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형설지공'이란 말을 방불케 하는 학구열이 대단한 아이들, 배도 고프지만 그보다도 공부를 더 고파하는 정말 기특한 아이들을 보며 다른 것은 몰라도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공부만큼은 최선을 다해 여건을 마련해주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그 후로는 전등이 세 개가 달려있는 간이 성당을 밤에 자습실로 쓰도록 했고 병원의 환자대기실에도 전등을 달아 야간 학습실로 쓰기 시작햇는데 매일 밤 많은 아이들이 공부할 것을 들고 찾아왔다. 야간 자습을 무었보다도 싫어하는 한국의 아이들이 정상인지 공부할 시간을 늘려달라고 졸라대는 이곳 아이들이 정상인지 햇갈릴 때가 있다. 처음엔 태양열을 이용한 전기라 용량이 부족해 밤 9시까지만 공부를 하게했는데 30분만 더 늘려달라고 졸라대는 통에 전동기를 돌려가며 9시 반까지 공부시간을 늘렸다. 몇 달이 지나자 그것도 부족해 ‘30분만 더’하며 졸라대는 아이들의 등쌀에 못 이겨 ‘공부하라고 애원을 해도 하지 않는 아이들도 있는데, 그래! 하고 하고 싶은 공부 실컷 한번 해봐라!’는 심정으로 결국은 밤 11시까지 공부 시간을 늘려놓았다. 자습을 시작할 때 다같이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끝날 때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함께 일어나 성모송으로 마무리하는 이곳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기특하고 예쁜지 모른다. 올해 겨우 고등학교를 시작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고등학교가 없어 많은 아이들이 불편을 겪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공부를 게속하고 싶은 아이들은 근처에 고등학교가 없어 120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도시로 유학을 가야했다. 없는 살림에 새로운 곳에서 스스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보통 큰일이 아니었기에 많은 아이들이 중학교를 마치면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공부를 할 수 없이 포기를 해야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형편이 그래도 조금 괜찮아 유학을 갔던 아이들도 학교의 낮은 질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고 많이 되돌아왔다. 선생님도 충분치 않고 작은 월급대문에 선생님들이 학교에 제대로 나오질 않아 정해진 시간표도 없고 학생들은 교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 교사가 오면 하루 한두 시간의 수업을 하고 그나마 선생님이 오지 않는 날엔 하루 종일 한 시간의 수업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야했다. 이런 가슴 아픈 사연들을 알고는 있었지만 고등학교를 시작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에 꼭 필요한 것인 줄은 알면서도 당장 시작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더 더욱 아팠다. 기도는 들어줄때까지 끈질기게 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인지 아이들은 ‘제발 고등학교를 열어달라’고 끈질기게 수년간을 졸라댔다. 고등학교를 시작해보려했지만 고등학교를 나무밑에서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부지걱정, 건물걱정, 돈 걱정, 선생님 섭외 걱정 등 걸리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기에 선뜻 시작할 수가 없었다. 몇해를 미루고 미루다 ‘에라 모르겠다’벌려놓고 보자! 어떻게 되겠지! 라는 똥배짱으로 -아니 섭리에 대한 강한 믿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올해 고등학교를 시작해버렸다. 한국에서 가져온 한 고등학교의 재고품을 교복으로 하고 케냐에서 교과서를 사서 나이로비에서 급히 교사 세 명을 구해 데리고 들어와 시작을 했다. 시작을 하고보니 처음엔 보이지도 않던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윤곽이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잇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건물이 없어 초등학교 건물 창고를 교실로 꾸며 고등학교를 시작하던 날, 모르는 사람들에겐 아프리카의 조그만 마을의 작은 고등학교의 초라한 개교식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우리 선교사들과 이곳 아이들에겐 수년간 함께 꾸어왓던 소중한 꿈을 이룬 감격스러운 날이었고 마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벅찬 날이었다. 교사를 구하기가 힘들어 나도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가르치는 것이 꽤나 재미있다. 수학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과 순수한 아이들의 질문 때문에도 더 그렇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삶에 특별한 맛을 내게하는 교실에서 만들어지는 나와 아이들간의 특별한 형태의 끈끈한 우정 때문에도 더 그렇다. 가전제품’, ‘할부구입’, ‘복리이자 ’, ‘소시지’, ‘세금 ’등이 무엇인지를 묻는 때묻지 않은 이곳 아이들의 순수한 질문덕에 가끔씩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와 있는 착각을 하곤 한다. 야간에 진료실에 앉아 가끔식 오는 응급환자를 치료하거나 수학문제를 들고 들어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하나의 소박한 즐거움이 되어버렸다. 요즈음은 연합고사를 준비하고 있는 중학교 졸업반 아이들의 부탁으로 매일 밤 환자대기실의 희미한 전등불 밑에서 수학과외 수업을 하고 있다. 케냐나 탄자니아를 가면 길거리에서 ‘기브 미 비스켓’ 또는 ‘기브 미 머니’라고 외치며 먹을 것이나 돈을 구걸하는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아이들과는 달리 이곳 수단에선 ‘기브 미어 펜’하며 연필이나 볼펜을 구걸하는 특이한 아이들을 많이볼 수 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기특한 아이들이다. 이들이 구걸하고 잇는 것은 단순하게 볼펜을 사기위한 돈 ‘백원’이 아니라 생각한다. 이들의 작은 외침은 배움의 권리에 대한 정당한 요구요 ,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이유이건 교육의 충분한 여건을 마련해주지 않는 것은 어른들의 명백한 직무유기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작은 외침이 아닌가 생각한다. 요즈음은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 사랑을 가르치는 성당과도 같은 거룩한 학교 , ‘내 집’처럼 느껴지게 하는 정이 넘치는 학교, 그런 학교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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