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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엇을 찾았는가?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8 조회수484 추천수4 반대(0) 신고
 
 

<무엇을 찾았는가?> - 윤경재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요한 1,35-42)

 

 요한 복음서를 흔히 영적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역사적 사실의 나열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영적 진실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사신 예수의 역사적 사실만 기록했다면 그것은 날짜 지난 신문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 저자는 한평생 주님과 함께 살아오면서 깨달은 바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니 이천 년이라는 시공간을 넘어 저자의 숨은 의도를 살피려면 행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영혼을 담으려 한 그 의도를 꿰뚫어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툭툭 던지는 듯하게 대화체로 엮인 복음서 내용은 상상력을 동원한 묵상을 통해서 접근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조망하는 시각을 견지한 채 부분 부분을 파고들어야 제대로 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튿날이란 표현은 요한복음서를 창세기처럼 쓴 저자의 숨은 의도입니다. 서막인 로고스 찬가는 창조 시간 이전의 진리를 고백한 것이고, 첫 표징인 가나의 혼인잔치가 일곱째 날에 벌어집니다. 중간에 하루하루씩 사건이 전개됩니다. 이 날은 세 번째 날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두 제자는 어디엔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길을 걸어가십니다. 이 대조는 思考와 생명이 정체된 인간과 자유로 살아가시며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분을 상징합니다. 마치 마태오복음서 20장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주인은 시간마다 다섯 차례나 일꾼들을 부르러 시장에 나갔으나 일꾼들은 하릴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는 비유와 같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 줄 모르는 인간, 어느 길이 올바른지 몰라 방황하며 모색만 하는 인간, 주저하는 인간, 자기의 아집에 사로잡혀 사고가 마비된 인간을 상징합니다. 일꾼이면 일해야 마땅한데 자기를 팔려고 서 있는 꼴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들에게 찾아오시는 분을 보자마자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외쳤습니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찬 외침이었습니다. 두 제자가 자신에게서 떠나 예수님께 찾아가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두 제자는 존경하는 스승이 감격하여 외치는 소리를 듣고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어떤 분이기에 스승이 그렇게도 겸손하게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라고 말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분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예수께서 앞서 걷고 뒤를 따르는 장면은 제법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따라 걷는 동안 두 제자는 무척 궁금했습니다. 어떤 말을 하실지, 자신들을 받아 주실지 마음속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 했을 겁니다. 말없이 걷던 예수께서 뒤를 돌아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상치도 못한 질문을 합니다. “무엇을 찾느냐?” 두 사람은 허를 찔린 듯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 대화가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라는 의미로 질문하신 것입니다. 인생의 궁금증을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참된 인간의 모습에서 찾으라는 말이었습니다.

 당황한 두 제자는 질문성 대답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문에 현답이었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이끄는 초대의 말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체험을 시도하라는 요청입니다. 선입견을 지닌 채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주저하지 말고 다가서라는 말입니다. 열 마리의 사냥개가 뛰어도 직접 먹잇감을 본 놈만 사냥에 성공하듯이 직접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남이 쫓으니 따라 뛰는 사냥개는 증거만 물을 뿐 끝까지 쫓으려고 하지 않는 법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증거가 사라지면 곧 포기하고 맙니다.

 더러운 악령이 든 사람은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며 자신을 폐쇄하려 들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개방하시고 모든 사람을 한 자리에 모으려 하셨습니다. 그들은 함께 가 예수님 삶의 자리를 체험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딘지 깨달았습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습니다. 유대 시간으로 열 시입니다. 열은 완성의 숫자입니다. 또 하나 작은 완성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룻밤을 함께 머물며 두 사람은 무엇을 찾고 보았을까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은 바로 익명의 우리입니다. 내가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가 묵상하기를 저자는 원했습니다. 

 그들은 성숙한 인격을 만났습니다. 어떤 어둠도 깃들지 않은 빛을 체험했습니다. 그 빛은 어둠을 칼로 베는 듯한 전광석화 같은 빛이 아니라 모든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온화한 빛이었습니다. 자신을 꿰뚫어 보시지만 아프지 않고 치유하는 따뜻한 시선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사회와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 자신을 무시하고 따돌림당했던 기억, 타인의 부당한 행위에 ‘노’라고 거절하지 못한 두려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타인과 동일시해야 안전하다고 주입하는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 모든 것이 내 탓이고 죄라고 강박하는 피해의식, 어릴 적에 받은 상처가 곪아 터져도 치유할 수 없었던 무력감, 남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열등감,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의기소침 등등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상처를 그분은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옷의 본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어찌 사는 길이 올바르고 자유를 느끼며 사는 길인지 오직 그분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 중에 첫째가 생명이고 둘째는 자유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 머물 때만 가능하다고 깨달았습니다. 사랑과 생명을 잃을까 두려웠기에 우리는 부자유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은 사랑을 가득 안고 태어납니다.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입니다. 아이 엄마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갓난아이도 부모를 사랑합니다. 오히려 부모보다 더 사랑이 깊은 게 어린아이들입니다. 조금만 예뻐해도 까르르 웃으며 엄마 아빠에게 매달립니다. 부모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어도 곧 잊고 용서합니다. 때로는 자기감정에 휘둘려 아이를 때리고 구박해도 아이들은 다 잊고 사랑을 선물합니다. 오죽하면 갓난아이가 삼 년 동안에 보여준 사랑과 행복을 부모가 평생에 걸쳐 갚는다는 말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같은 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까닭도 어린아이의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랑의 능력을 자라면서 잃어버립니다. 사회와 부모가 억압했습니다. 사랑보다 안락과 생존이 더 필요하다고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잠시 머문 두 사람은 사랑이 온전히 회복하는 길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랬기에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인간 회복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의미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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