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으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는 이유는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해서입니다. 가난에 억눌린 사람들은 빵이 필요해서, 질병에 고통 받는 사람들은 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할 때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하느님을 찾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우리를 찾고 계신데 우리는 하느님께는 관심이 없고 단지 돈과 건강과 명예의 선물만 기다리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느님보다 하느님의 능력을 찾는 갈망이 순결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기에 우리는 바른 것을 구해야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메시아를 갈망하며 찾고 있었기에 결국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여러 명의 제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 위대한 광야의 선지자를 스승으로 하여 하느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서 있을 때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향하여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는 스승의 권면대로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그분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무엇을 찾느냐?”(1,38) 하고 물으십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 뒤를 따라오면 “왜 따라오느냐?”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너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얻기 위해 나를 찾아왔느냐는 것입니다.
그 당시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입니다.(6,26 참조) 이렇듯 군중이 기대한 것은 육신 생명에 필요한 빵이었고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달라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우리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면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가는 방향이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분주한 우리를 향해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는 무엇을 찾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1,38) 하고 여쭙니다. 이것은 마치 동문서답을 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예수님이 살고 계시는 ‘장소’를 물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를 ‘살펴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면서 예수님의 삶과 인격과 진리를 배우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와서 보아라.”(1,39) 하고 초대하십니다. 보통 초대는 아무한테나 더욱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사는 것이 초라해서 보여주기 부끄러우면 찾아오겠다고 해도 오지 말라고 막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라고 하셨는데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를,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을 직접 체험하고 깨달으라는 초대입니다.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묵으면서 그들의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말대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전도 방법은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도 주님과 대화를 통해 그분이야말로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우물가에 물동이를 버려둔 채 고을로 달려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4,29)라고 했습니다. 여인의 이 같은 전도 결과 그 고을에 살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와서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4,42)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는 “와서 보아라.”(1,39)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 보니 그분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것은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과 같이 와서 보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안드레아는 메시아를 찾았기에 먼저 형 시몬을 찾아가 다짜고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1,41)라고 증거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이렇듯 우리는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시몬을 눈여겨보신 예수님은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1,42) 예수님은 이미 시몬이 누구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시몬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될지를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시몬은 케파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여기에 있게 한 것도 지금 나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장차 변화될 나의 모습을 이미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허물과 약점으로 범벅된 시몬으로 살지만 그 안에 이미 케파가 있음을 보고 알아주시는 바로 이 한량없는 신뢰와 자비의 시선 때문에 시몬은 점점 케파로 변화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사실 시몬, 아니 주님께서 보시는 대로라면 케파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무엇을 찾느냐?” 하며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지만 동물처럼 땅의 것만, 밑에 있는 것만을 찾지 말고 위의 것, 곧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하느님한테서 왔기 때문에 하느님 없이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물었던 요한의 제자들처럼 그저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으면 합니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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