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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당신의 갈릴래아 - 최강 스테파노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10 조회수504 추천수5 반대(0) 신고
 

당신의 갈릴래아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우리는 기나긴 절제와 극기의 사순시기를 보내고 마침내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였습니다. 해마다 부활을 맞이할 때면 저를 저절로 웃음 짓게 하는 한 가지 사건이 생각납니다. 로마에서 유학하던 시절 부활성야 미사는 제가 머물던 교황청 외방선교회 성당에서 그 지역 교우들이 함께 모여 성대하게 거행하곤 했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각자 집에서 준비해온 부활절 빵과 계란, 그리고 샴페인과 포도주를 함께 모아서 나누어 먹습니다.


   그때 저와 가깝게 지냈던 멕시코 출신 다비데 신부가 부활 계란 꾸러미 하나를 꺼내들었는데 희한하게도 그 계란들에는 보통 쓰여 지는 ‘알렐루야Alleluia’라는 문구 대신에 ‘조심’ 혹은 ‘주의’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아뗀찌오네Attenzione’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무심코 보면 ‘알렐루야’라고 쓰여 있다고 쉽게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물감으로 기교를 부려 ‘조심’이라고 쓰여 있었지요.


   다비데 신부는 재밌다는 듯 낄낄 웃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테이블에 계란을 탁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그 계란은 삶은 것이 아닌 생계란 이었습니다. 계란 노른자가 튀어 오르고 순식간에 주위는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계란 꾸러미에는 조그만 쪽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는 “예수님만? 이제는 당신 차례입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천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나, 혹은 매년 이맘때 돌아오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들이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어느 장난끼 많은 신부님이 그런 식으로 나눠주신 것 같았습니다.


   다시 한 번의 부활 축제를 맞이하는 우리들 역시 ‘조심’스럽게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매년 부활을 맞이하지만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의 부활이 생생하게 체험되지 못한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어떻게 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이제 우리가 ‘지금, 그리고 여기’서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점은 부활의 시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과거 시점의 진술은 우리 인간들의 시간감각에 맞춰진 표현일 뿐입니다.


   영원이신 주님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라는 선후가 없고 오직 현재만이 존재합니다. 예수께서는 이천년 전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항상 죽는 분이고 또 항상 부활하시는 분입니다. 부활 축하 인사를 나누는 부활주일뿐 아니라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에도 부활하시며 우리들을 부활의 삶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항상 현재인 이유로 예수님을 따라 죽음으로서 맞이하는 우리들은 부활 역시 죽은 다음에 부활‘할 것이다’라는 미래 시점의 진술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죽은 다음’이라는 미래의 시간과 공간은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철저히 은폐되어 있으므로 아무런 인간적인 차원의 추측마저 불허합니다. 예수가 말씀하시는 부활은 우리로서는 전혀 추측조차 할 수 없어 거의 허상과도 같은 ‘죽은 다음’이라는 시공간상의 존재 양상의 변화가 아닙니다.


   사실은 저처럼 이렇게 복잡하게 따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예수께서 의도하신 부활의 가르침과는 한참 멀어지고 있습니다. 부활은 결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의 차원이 아닙니다. 부활은 신앙인 개개인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삶의 변화를 통해 비로소 온 몸으로 깨달을 수 있는 현재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적인 사유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부활을 가리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 스스로의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마태28,10)


   주님은 당신의 형제들에게(우리들에게) 부활한 당신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서 ‘죽은 다음’의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 쪽을 가리키십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야 합니다.


   갈릴래아!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회개하라’는 외침과 함께 처음으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셨던 곳, ‘나를 따라 오너라’하시며 호숫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와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를 처음 부르셨던 곳,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시며 처음으로 전도여행을 떠나셨던 곳이 바로 갈릴래아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장소는 바로 갈릴래아입니다.


   우리들 영혼의 갈릴래아입니다. 갈릴래아는 ‘회개하라’는 주님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갈릴래아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아무런 주저함 없이 ‘예, 주님’하고 응답할 수 있었던 첫마음입니다. 갈릴래아는 주님을 만나 ‘나’를 버리고 ‘너’를 향해 떠날 수 있었던 우리들 영적 여행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그들의 삶과 신앙 여정에서의 각기 고유한 갈릴래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출발점에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회개’에 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죽음 이후의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는 게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나’를 버릴 수도, ‘너’를 향해 떠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갈릴래아’는 결코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육신을 입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이렇게 살아서 생생한 부활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부활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니 만약 부활하신 주님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 머물러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인들이 서 있던 캄캄한 빈 무덤 속이라는 것을 알아 차려야 합니다.


   정녕 부활을 원하거든 주님과 그대의 갈릴래아를 향해 떠나야 합니다. 떠나지 않으면 올 해도 역시 우리는 관객으로서 저만치 거리를 두고 객석에 앉아 주님 혼자 돌아가시고 주님 혼자 부활하시는 모노드라마를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당신의 갈릴래아가 어디라고 콕 찍어 가리켜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부활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당신의 갈릴래아를 깨닫는 일은 교회도, 교회의 지도자들도 대신할 수 없는, 하느님 앞에 홀로 선 당신만의 고유한 영적 작업입니다. 당신의 갈릴래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뵙고 새로운 부활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당신의 갈릴래아는 어디입니까? 그곳을 향해 어서 떠나십시오. “떠나라”(루가10,3)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하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본 일이 없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아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이 하느님이라는 뜻이다.”(마태22,31-32) 

 

▒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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