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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주님 세례 축일) .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08 조회수520 추천수3 반대(0) 신고

주님 세례 축일         2010년 1월 10일


루가 3, 15-16, 21-22; 이사 42, 1-4.6-7.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활 이전에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이 행하던 회개의 세례 운동에 예수님이 가담하셨던 것입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 때문에, 요한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인물이었다고 사람들이 오해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세례 받은 사실을 보도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요한에게 가지 않고, 예수님에게 가도록 장치를 하였습니다. 그 하나가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요한의 고백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말은 성령이 불혀 모양으로 제자들에게 내려왔다고 말하는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장면을 상기시킵니다.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같은 저자가 집필하였습니다. ‘신발 끈을 풀어드린다.’는 말은 요한은 예수님에 비하면 종도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세례 받은 사실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초기 신앙인들이 믿던 바를 기록하였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기도하고 계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태로 그분 위에 내리셨다.’고 말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시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새로운 창조를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창조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말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시편(2,7)의 말과 하느님의 종에 대한 이사야서(42,1)의 말을 합성하여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인데 자기 죄가 없으면서도,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하느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예수님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인이 받는 세례를 죽음과 관련짓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오실 때, 당신의 오른 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는 제자들에게 “당신들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10,38)라고 예수님이 물으셨다고 전합니다. 여기 “내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누구나 다 그분의 죽음과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았다.”(6,3)고 말합니다. 초기 교회가 세례를 죽음과 관련지어 생각한 것은 세례로써 시작된 예수님의 활동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은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앞에 열어 놓은 메시아의 나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대하듯이,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고,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는 현세적 번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의 모습은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하는 일입니다. 세례는 그 삶의 시작입니다.


세례로써 하느님의 자녀 되는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삽니다. 신앙은 이론을 배우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배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재물을 가지면, 가진 그만큼 나의 현세적 삶은 편합니다. 권력을 가지면, 가진 그만큼 나는 강자로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한 사람 편하고, 내 한 사람 행세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하여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내 한 사람의 안일과 출세를 보장받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뜻을 이루어주기 위해 계시지 않습니다. 성전은 우리의 뜻을 이루고자 찾아가는 민원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 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삽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 하느님과 현세적 부귀영화를 함께 가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현세적인 것을 잃는 것이 죽음입니다. 잃고 또 잃으면, 자기 목숨마저 잃습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잃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엎어져도 돈을 벌고, 자빠져도 덕 보겠다는 것은 사람답지 못한 일입니다. 자녀를 낳고 키우는 부모는 부모로 살기 위해 많은 것을 잃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재물과 지위와 권력을 자기 인생의 최대 보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사람은 이웃을 형제자매로 생각합니다. 재물만을 좇는 사람은 자기의 자유가 재물만을 위한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그 자유의 주인이십니다. 하느님을 이 세상 혹은 이웃과 대립 관계 안에 두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아끼고 보살피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신앙으로 입문하는 성사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사는 자유를 누리겠다고 약속하는 성사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고 하느님의 자유를 좇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세상의 물질과 부귀영화를 자기 삶의 유일한 보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례는 그런 것을 인생 최대의 보람으로 생각하였던 자기의 과거에 죽는 성사입니다. 자비롭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 새롭게 살겠다는 성사입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오늘입니다. 편을 갈라 상대의 발목을 잡고, 상대를 죽이고, 나와 내가 속하는 집단이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 한국 의회 정치의 기본 수칙으로 보입니다. 자기와 자기 집단이 희생하여 국민을 위한다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자주 사용되는 순종도 상대를 누르고 자기가 군림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그리스도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례는 이 세상의 허례허식에 죽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자유로운 마음이 하느님 자녀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말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가 받은 세례도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도록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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