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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체 성사를 알고, 사랑하고, 생활하기 / [복음과 묵상]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10 조회수2,262 추천수3 반대(0) 신고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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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성체 성사를 알고, 사랑하고, 생활하기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성체 성사의 불꽃이 영혼 안에 있다면, 생명과 모든 선의 신성한 싹이 마음 속에 뿌려진 것입니다."
성체의 신비 안에 저장된 무진장의 보화의 일부라도 캐내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마음과 의지력을 동원하여 집중적인 노력을 하기로 하자.


정신의 수련(修鍊)

먼저, 정신을 가다듬어 성체에 대하여 주의깊게, 질서있게 묵상을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 사랑의 신비에 대하여 더 깊은 뜻을 발견하고 묵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서적들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간단하나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 중에는 성 알퐁소 드 리구오리의 '성체 성사와 성모님께의 방문', 그리고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의 '성체 성사 안의 예수님의 현존과 영성체' 등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성체의 사도로서 가장 뛰어났던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께로 향하여 배우도록 하자.  그분의 성소와 사명은 모든 크리 스챤들을 성체 성사에로 이끄는 것이었다.  성인께서 그 사명이 어찌나 충실하셨던지, 사람들은 그를 "성체 성사의 사제"라고 불렀다.
성인께서 성체 성사의 사제회를 설립했을 때, 그는 그의 생애를 성체의 예수님께서 다스리시게 되심이라는 목표에 봉헌하였다.  그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열정의 말을 기록으로 남겼다.
"사랑하는 예수님, 여기 저의 생명이 있습니다.  보소서, 당신께 옥좌를 세워드리고 당신께 당신을 흠숭하는 백성, 당신의 친구들의 가정을 이룩해드리기 위해서라면 저는 돌을 먹어도 좋고 버려진 채 죽어도 좋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랑에 가득한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심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성 벨라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체는 하늘과 땅의 모든 사랑들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또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성체 성사는 사랑의 성사이다.  그것은 사랑을 상징하며 사랑을 생산한다."

성체 성사의 이 사랑에로 우리의 주의(注意)를 집중시키는 하나의 구체 적인 예는 이태리 란치아노에서의 성체 기적이다.  그곳에서는 축성된 면병이 살아있는 살의 모양으로 변했으며 1,00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그 상태로 보존되어오고 있다.  최근에 이 성체의 작은 조각을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그것이 아직도 살아있는 살의 조각이며 인간의 심장 근육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성체는 바로 주님의 심장인 것이다.

하루는 아라비아의 왕자였던 압데드 카데르가 프랑스 관리와 함께 마르세유의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임종하는 이에게 노자 성체를 모셔가는 신부를 보았다.  그러자, 같이 가던 프랑스 관리가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아라비아의 친구는 왜 그렇게 하는지를 물었다.
"지금 사제가 환자에게 모셔가고 있는 나의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왕자가 다시 묻기를, "지극히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당신을 그렇게 작은 모양으로 빈민의 집을 찾아가신다는 것을 당신이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우리 마호메트교도들은 하느님을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관리는 대답했다.
"그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위대하심만 알고 그분의 사랑은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대답이다.  이를 확인하듯이, 성 베드루 에이마르는 외쳤다.
"성체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고귀한 증거입니다. 그 다음에는 천국 자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크리스챤들이 성체 성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그 사랑의 무한한 깊이를 모르고 있는가!


마음의 수련(修鍊)

둘째, 성체 성사의 보화를 캐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음을 사용하여야 한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듯이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저주받을지어다."(1코린토 16,22).
모든 크리스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면, 성체께 대한 사랑이 마음으로부터 용솟음쳐나와야 할 것이며 우리들 모두 안에 항상 생동해야 할 것이다.

모든 성인들 가운데 성체께 대한 사랑에 있어서 가장 모범적인 경우는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였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는 성체께 대한 사랑이 너무나 강렬하여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는 "성체 성사의 바보"라고 불리우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사랑도 또한 수련이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도 진정한 하느님을 사랑하며 "생명의 근원"이신 분을 그리워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성체 성사는 이러한 사랑의 수련에 있어서의 정점(頂點)이며, 그 성사의 타오르는 불꽃이 피조물과 예수님의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성녀 젬마 갈가니는 다음과 같이 절규하였다.
"당신의 위대하시고 훌륭하신 사랑으로 인하여, 당신의 가장 비천한 피조물에게 당신이 감지될 수 있게 해주시고 당신 성심의 찬란한 광채 안에서 당신을 보여주심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자신과 함께 계시게 하기 위하여 "사랑의 천막"이 되기를 갈망함으로써 성녀 젬마는 마음의 수련을 하였다.  그녀는 예수님과 항상 함께 있기 위하여 자신이 성합 안의 작은 공간을 가질 수 있기를 갈망하였다.  성녀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를 간구하였다.

예수 영해의 성녀 테레사가 심하게 아플 때, 예수님을 영하기 위하여 성당까지 간신히 기다싶이 하여 갔다. 어느 날 아침, 영성체 후에, 그녀는 자기 방에서 쓰러졌다.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는 안된다고 어느 수녀가 말했을 떄 성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오, 나의 이 고통이 영성체 한 번에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갈멜 수녀원 외의 다른 많은 곳들에서 매일 영성체가 허락되지 않았었다.  성녀는 예수님께 간절히 졸랐다.
"당신께서 감실 안에 항상 계시듯이 저와 항상 함께 계셔주소서.  당신의 작은 면병(자신을 말함)으로부터 당신의 현존을 절대로 거두지 마소서."

성녀 마가렡 마리아 알라콬이 세속을 떠나 봉쇄 수도원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을 때 그녀는 사적(私的)인 서원 하나를 하였으며 이를 자신의 피 속에 기록하였다. "모든 것을 성체를 위하여, 그리고 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도록." 
성체께 대한 성녀의 불타는 사랑을 설명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성녀가 성체를 모실 수 없을 때에 는 다음과 같이 열절한 사랑의 절규를 하였다. "영성체에 대한 열망이 너무도 강하여 만약 성체를 받기 위하여 불 위를 걸어가야 한다면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지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그녀의 고해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 즉 성체 안의 주님을 주십시오."
그녀는 또 말했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에는 나는 성당 안으로 가서 그분을 쳐다 봅니다..... 그리고 또 쳐다 봅니다...... 이렇게 저는 만족을 얻습니다."

성녀 벨라데따가 오랜 기간 고통스런 병을 앓고 있을 때, 자신의 불면증에 대하여 행복감을 표시하였다.  왜냐 하면, 깨어있음으로써 성체 성사 안의 예수님과 더 오래 일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침대 옆 커튼에 그려져있는 작은 금색의 성광 모양을 가리키면서, "제가 외롭게 고통 받고 있을 때 그분의 방문은 저에게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고저 하는 열망과 힘을 줍니다."라고 말하였다.
바로 이것이 "마음의 수련"이다.


의지(意志)의 수련(修鍊)

세 번 째로, 성체 성사의 보화를 캐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를 수련해야 한다.  이는 성체에 관한 하느님의 교훈들을 생활화함으로써 실행할 수 있다.  우리가 성체에 대해 묵상하면서 그 무한한 가치를 발견하고 또 영성체 때에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고 하드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체 성사는 언어의 표현을 초월하는 사랑을 가르친다.  그것은 전적인 자기 희생, 그리고 겸손과 나서지 않음에 대한 유일무이한 교훈을 가르친다.  그것은 인내와 무제한적인 헌신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얻는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무한한 너그러우심으로써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심"(요한 13,1)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무엇인가를 성취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약함을 느낄 때 예수님께로 향해서 그분께 말씀드리며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기를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바로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요한 15,5)고 말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체와 함께라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놀라게 하고 감동시키게 될 일을 획득할 수 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화되는 것이다.  성 아오스딩은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음식이 우리 몸의 일부가 되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변화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신비체의) 일부로 변화시켜주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테오 11,28)라고 하신 그분 앞으로 나아가자.  그분을 자주 방문하자. 우리가 할 수 있을 때마다 성당에 들어가서 감실 앞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자.  우리의 마음과 몸을 그분 앞에 대령해서! 
성인들은 성체 성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방문하며, 성시간을 지내고, 신령성체를 하며, 화살기구를 바치고, 마음으로부터의 열절한 사랑을 표현하기를 항상 열망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영적인 유익을 얻었으며, 얼마나 많은 선익을 남들에게 끼쳐주었던가!

복자 베드루 죠지 프라싸티가 토리노에 있을 때 대학 시절의 동료였던 한 친구가 말했다.  "우리 가서 간식이나 사먹을까?"  베드루 죠지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대답했다.  가까이 있던 성 도미니끄 성당을 가리키며, "그래, 저 카페에 가서 그렇게 하자."  그들은 성당에 들어가서 감실 앞에서 잠시 기도하였다.  그리고 애긍함으로 가서 베드루 죠지가 말했다.
"여기에 간식이 있다."
그들은 호주머니를 뒤져서 불쌍한 이들을 위한 애긍을 함에 넣었다
."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강론 중에 성체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몸을 면병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답을 말했다.
"여러분의 눈으로 나쁜 것을 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희생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혀로 점잖치 못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희생이 됩니다.  여러분의 손으로 죄를 짓지 마십시오.  이 또한 번제(燔祭)가 됩니다."

성녀 꼴레뜨의 눈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성녀는 항상 눈을 내리뜨고 있었으며 감미로운 단정함 속에서 묵상하는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저의 눈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가득차 있습니다.  미사 성제의 거양 성체 때 그분을 주시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습이 다른 어떤 모습으로도 대체되는 것을 저는 원치 않습니다."
성인들은 예수님의 성체와 접촉됨으로써 축성된 그들의 혀를 자제하여 말을 조심하였다.

성인들은 그들의 모든 이웃 사람들, 특히 가장 궁핍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의 감정이 성체를 받아모시는 그들에게 전달됨으로써 그들도 사랑에 가득차서 선행을 하였음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성 프란시스 드 살레즈는 신자들에게 성체 성사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라고 권하였다.  왜냐하면, "이 신성한 성사에 계신 그분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선하심과 그분의 순결하심을 흠숭하고 또 이에 참여함으로써 여러분들 또한 아름답고, 선하고, 순결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성인은 말하였다.

우리들 또한 이렇게 우리의 의지를 훈련할 수 없을까?  성인들로부터 배우고 그들의 선행을 본받도록 하자.

(성체 성사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




[11월 11일, 수요일] 생명의 말씀 '복음'  
<루카 17,11-19>
[오늘의 묵상 - 신은근 바오로신부님, 마산 호계성당]


[복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한센인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혼혈인이라며 비웃고 이방인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은 감사드리러 왔는데, 정통 유다인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책입니다.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이 한센병보다 나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아홉’은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은혜를 망각하며 산다는 암시입니다.

병이 나은 사람들은 왜 감사를 잊고 가 버렸을까요? 예수님께 갔더라면 또 다른 은총을 받았을 터인데, 왜 그랬을까요? 너무 기뻐서 그랬을 것입니다. 벅찬 감정에 취해 순간적으로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랬더라도 그들은 은혜를 망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그렇게 됩니다. 청할 때의 ‘다급한 모습’을 감추려 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은총에는 감사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더 큰 축복으로 인도됩니다. 감사는 은총을 붙잡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불만이 아홉이고 감사가 하나이더라도, ‘하나’를 기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바뀌게 됩니다. 기쁨이 아홉이고 불평은 하나인데도 불평만을 잡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지요? 언제라도 시각이 삶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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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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