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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38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03 조회수504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이번 주일 아침에 TV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기독교 방송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장모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목사들은 복음 말씀을 어떻게 설교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대략 30분 정도 시청하였습니다. 몇 번이나 채널을 돌리고 싶었지만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참고 또 참아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말씀의 바른 전달이 아니라 최면을 걸고 있었습니다. 사실 최면도 과분한 표현이고 더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지만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성경 말씀을 어떻게 저렇게 왜곡할 수 있을까? 저는 그날 그 모습을 보고 성경 말씀을 저렇게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경악하였으며, 성경의 올바른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습니다. 그날 설교 복음은 "나는 참포도 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로 시작되는 요한 15,1-10절 말씀이었으며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요한 15, 2) 하신 말씀에 중점을 두고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열매의 의미를 '전도'로 한정하여 신도들에게 1년에 1명 이상은 무조건 교회에 데리고 오는 것이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계속하여 주입시키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무수히 아멘, 아멘을 유도하고 있었으며 신도들이 아멘! 아멘! 할 때마다 저도 같이 아멘! 아멘! 하였습니다. 제 아멘은 주님,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아멘, 아멘 하였습니다.

아마 오늘 복음도 예수님을 믿으면 횡재한다고 설교를 할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서 횡재를 하여야 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손해를 본다면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횡재를 하지 못하다면 두 가지 사실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는 믿음을 잘못 이해한 경우이고 두 번째는 횡재를 잘못 이해한 경우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오류를 동시에 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 된다는 것을 믿고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이천년 전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므로 지금 저희가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돌대가리라 할지라도 이천년 전 무지몽매한 그들만도 못하겠습니까? 말씀의 실천이 어려운 것이며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속할 것입니다.

성경 해석은 교회의 고유 권한으로 교회의 해석과 다른 해석은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전의 해석에 관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각자가 판단할 사안이지만 어느 누구에게 경전 해석에 관한 권한이 전적으로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설득력을 유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보편적인 진리를 기록한 경전의 경우에는 해석이 아니라 각자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므로 성경 해석의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부여될 수 없으며 이런 이유로 묵상이란 단어가 생겨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실천하라고 하여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직 부단한 자기 수행만이 사랑의 실천을 가능하게 할 수 있으며 부단한 수행으로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만이 진리를 깨닫게 한다.’하였으나 우리의 실제 삶에 있어서는‘진리를 깨달은 자만이 참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가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올바른 깨달음은 자비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엄청난 횡재를 얻게 될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 중생과 동고동락하며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며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면 예수님처럼 민중을 구원하고, 부처님처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자비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자비의 삶이 오늘 말씀하신 '사람을 낚는 삶'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참된 깨달음의 길로 가지 못하고 지식만 축적한다면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잘못된 욕구만 생겨나므로 이점을 늘 경계해야 할 것니다. 언제쯤 그동안 익힌 성경 말씀을 모두 잊어버리고 從心에 따라 행동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지 그날을 꿈꾸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였습니다.
참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베드로의 사람됨을 높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붙잡는 군중들로 부터는 떠나셨지만
떠나기를 청하는 시몬 베드로에게는 오히려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저희도 참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그런 자들이 되어
주님의 초대를 받을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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