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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 24일 야곱의 우물- 마르 9, 30-37 묵상/ 내 안의 아이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24 조회수525 추천수5 반대(0) 신고
내 안의 아이

그때에 예수님의 일행이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 9,30-­37)
 
 
 
 
◆스승은 비장하게 수난의 길을 가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다투고 있다.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데려다 제자들 가운데에 세우셨다. 아이는 제자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곧 제자들은 서로 큰 사람인 줄 착각하고 있지만, 예수님 눈에는 아직도 한참 어린아이로 보인다는 것이다.

어디 그들만 그럴까? 조그만 일에 자존심을 세우고 뾰족한 나, 상처 준 사람을 쉽사리 용서하지 못하고 불목한 관계를 풀지 못하는 나, 잘하면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고, 잘못하면 이내 핑계거리를 찾아 책임을 면하려는 나, 신앙생활 몇십 년에 남을 지도하는 입장이 되어도 인간적인 미숙함은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내 안에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는 증거다. 안토니 블룸은 ‘마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기 자신을 명상하는 허무’라고 했다. 미숙한 자신을 보는 것이 그만큼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이를 데려와 껴안으시는 행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다. 곧 자신의 유치한 모습이 한심스러울 때마다, 다른 사람의 모습에서 실망할 때마다, 힘들어도 우리 안에 사는 아이를 시선 한가운데로 데려오라는 것이다. 그 아이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따듯이 껴안아 주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바라는 ‘큰 사람’은 진정 그렇게 미숙한 서로를 인정하고 수긍하며 도닥여 주는 동안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인옥(수원교구 기산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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