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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기석 신부 / 4강 예수님 시대, 지도자 집단의 사고와 행동. 팔레스티나의 경제 구조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11 조회수2,544 추천수1 반대(0) 신고

박기석 신부님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제4강 예수님 시대, 지도자 집단의 사고와 행동. 팔레스티나의 경제 구조

 

안녕하십니까?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입니다. 지난 시간에 마르코 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주시고, 행적을 남기신 구체적인 시공간 즉, 마르코 본문의 상황,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를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다인의 땅 팔레스티나, 로마 황제에 의해 봉분 왕으로 권력을 유지하던 헤로데 대왕과 그의 아들들,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필리포스의 모습을 우리는 보았지요. 그리고 큰아들 아르켈라오스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유다 지역에서 로마 황제의 직접 지배를 대신한 총독 정치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나름 자치권을 행사하던 예루살렘 최고 의회와 또 그 지역 그 당시 이스라엘 민중들, 백성들과 함께 했던 유다이즘을 대표했던 성전과 회당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민족 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에 사람이 되어 오셨고, 그렇게 사람으로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영원한 생명을 외치신 예수님 앞에 보인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 특히 유다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지도자 집단의 사고와 그 행동이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서 팔레스티나의 경제구조까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모두 하느님을 믿는 같은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그 당시 사회에서는 다양한 정신의 흐름들이 있었고요. 또 여러 종교적 당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함께 살펴볼 이 마르코복음서를 읽다 보면 율법학자, 사두가이, 바리사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당시 팔레스티나의 대표적인 집단인 이들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어야만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들을 모르고서는 예수님께서 왜 그들과 논쟁을 벌였는지 또 이러한 집단들이 왜 예수님께 적대감을 그렇게 갖고 있었는지 납득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팔레스티나의 대표 집단 : - 율법 학자(율사, 랍비) - 바리사이 - 사두가이

 

먼저 율법 학자입니다. 랍비라고 하지요.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에서 유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학자이고 법률가이고 교사였고요. 그러나 이들은 사제는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책임을 바로 이 사제들이 맡았지만 신약 시대에는 율법 학자들이 전문가로서 그 일을 맡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고도의 집중된 교육과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양성이 되었지요. 

 

* 율법 학자(율사, 랍비) : 신학자, 법률가, 교사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성한 모세 율법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을 가르치는 일 즉, 율법 학자들은 유다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지요. 실제로 율법 학자들은 자기들이 배우 익힌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힘과 권위를 누렸고 최고 의회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 중에 바리사이들이 많았어요. 복음서에서도 보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또 많이 언급되고 있지요. 복음서에서 율법 학자들은 성문화된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하는 학자들이었고요. 

 

* 율법 학자 : 성문화된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하는 학자 

 

바리사이들은 그런 율법 학자들이 해석한 율법을 충실하게 삶 속에 실천으로 옮긴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서화된 율법만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은 문서화된 율법을 연구하는 율법 학자들을 넘어서서 구전으로도 내려오던 율법을 생활 속에 실천하던 사람들이 바리사이였다는 겁니다. 


* 바리사이 : 율법 학자들이 해석한 율법을 충실하게 실천에 옮긴 사람들

 

그래요. 율법 학자들과 함께 주님께 불행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  바로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요. 바리사이들은 복음서에서 주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일 때 많이 등장합니다. 이 바리사이라는 말의 어원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분리하다, 구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파라쉬나 아람어 페라쉬에서 나왔고요. 무엇을 분리하며 어떤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구별한다는 뜻일까? 이 점이 궁금하지요. 

 

율법에서 규정한 온갖 부정함으로부터 분리하고, 율법을 모르는 무식한 서민, 대중들과 또 그리스 문화와 관습에 젖어 있던 이방인들이나 유다인들에게서 자신들을 구별한다는 의미로서 이런 의미의 명칭을 사용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은 율법에 관한 해석과 순수한 열정으로 실질적으로 대중 사회에서는 가장 인정을 받았고 존경을 받았던 대상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움직인 집단이었다는 말이지요. 

 

게다가 유다인들의 최고 의결 기구이며 법정이었던 최고 의회에서도 바리사이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라는 겁니다. 기원후 70년에 로마제국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도, 물론 성전이 무너지면서 사제 계층인 사두가이들이 몰락을 합니다만, 사제 계층이 없어졌기 때문에 유다인들을 이끌었던 두 파는 바로 이들 바리사이들 몫이 되었다는 거죠. 

 

이들 바리사이들이 갖고 있던 종교적 이상은, 예루살렘 멸망 후에 얌니아 지방에서 새롭게 태어납니다. 즉, 그때부터 시작된 라삐 유다이즘이 바로 그것이지요. 여기에서 바리사이들이 가르친 내용의 핵심은 성문화된 율법과 또 구전 율법을 똑같은 가치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밖에도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충실히 지킴으로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고, 또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닮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사와 사탄의 존재를 믿고 있었고, 영의 존재와 또 의로운 이가 받을 보상과 죄인들이 당할 징벌 즉, 마지막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의인들의 보상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부활이라고 하는 생각을 이때부터 이들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그런 면에서는 비슷했던 거예요.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믿고 있었다는 겁니다. 즉 죽음 이후의 삶과 육신의 부활도 믿고 있었던 거죠. 

 

* 바리사이 : 성문화된 율법과 구전 율법을 같이 받아들임

* 사두가이 : 성문화된 모세5경만 정경으로 받아들임

 

그런데 이와 반대로 사제 계층인 사두가이들은 바리사이들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부정했고, 오직 성문화된 모세 5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영혼의 불사불멸, 육체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모세5경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계시가 완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후 새로운 계시는 없을 것이므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하느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라는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동시에 믿는 바리사이들과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두가이들은 바리사이들이 받아들인 구전 전승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성문화된 성경만을 구약 정경만을 받아들였습니다. 또 정치에 무관심한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지요. 그래서 이런 모습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이미 최고 의회에서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어요. 

 

* 바리사이 : 정치에 무관심

* 사두가이 : 정치에 적극적 개입 

 

그런데 여기서 역설적인 것은 이렇게 서로 다른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이 이렇게 서로 여러 면에서 정반대의 모습, 입장을 취했지만 예수님을 반대하는 일에는 서로 일치했다, 합세했다라는 점입니다. 마치 헤로데 안티파스와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서로 안 맞는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님 재판과 관련해서는 서로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죠. 재판 이후에 서로 친구가 되지요. 이렇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있어서는 정치가들, 권력자들, 심지어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백성의 지도자 집단도 서로 입장이 달랐음에도 예수님을 죽이는 데는 한 목소리가 되었다. 한 친구가 되었다라는 것. 이것이 굉장히 역설적입니다. 

 

여하간 사두가이들은 본래 통치 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부유한 지주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또 정복자 로마에 자발적으로 협조했고, 정치와 종교의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했지요. 특히 예수님 시대의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바로 최고 의회를 확 쥐어잡고 있었어요. 그래서 막강한 부와 세력을 과시했지요. 이를 위해 사두가이들은 백성들을 더욱더 율법의 노예로 만들었고, 기득권을 향유하던 자기들의 취향을 정당화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확고하게 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오늘 방송 마지막에 다룰 팔레스티나의 경제구조에서 더욱더 드러납니다. 

 

그러다 보니 사두가이들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가 좋았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당연히 그 관계가 원만할 수가 없었지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영원한 생명의 약속과 부활 사상은 사두가이 교리와 정면으로 대립하였습니다. (부활 논쟁 마르 12,18-27 참조) 더구나 성전에서 환전상들을 내쫓고 뒤엎으시면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누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 아버지 하느님의 기도의 집이 아니냐라고 하면서 성전 정화 사건을 벌이시지요. 

 

그런 예수님의 행동은 이들 사두가이들, 기득권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기 때문에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최고 의회에서 대사제 가야파의 발언이 그것이지요.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참조)

 

하지만 이 사두가이들의 권력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기원후 70년 성전 파괴와 함께 사두가이들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유다와 성전의 몰락은 그곳에서 세속적인 부와 권력을 누려온 사두가이들의 기득권도 함께 앗아가 버렸던 것이지요. 로마제국의 식민지 하에 있던 팔레스티나, 빌라도는 유다를 다스리는 로마제국의 총독이었고,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버지 헤로데 대왕에 이어 로마제국의 위임을 받아 갈릴래아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를 달라 표현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로부터 귀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 이후, 기원후 70년 이 성전이 파괴되기까지의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바로 이 시기의 유다이즘, 여기 유다이즘에는 바리사이들 또 이런 사두가이들의 다양한 종교적 당파들이 존재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최고 의회와 성전 그리고 회당이 사회 지도자들과 백성들 삶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마르코복음서의 예수님, 즉 그 시대에 팔레스티나에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바로 예수님은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의 기술자 즉, 목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변두리로 내몰린 소외된, 밑바닥 사람들과 친교를 함께 나누셨지요. 이 친교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예수님과 소외된 이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했던 식사 자리였습니다. 

 

*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마르 2,13-17) 

 

당시 사회의 상류층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로마제국의 지도자들, 대사제, 수석 사제들, 최고 의회 의원들과 같은 유다 지도자들과 함께 한 식사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인정받지 못했던 소외층, 하류민들, 하층민들과의 식사였어요. 그러기에 이 식탁 친교 즉, 밥상 친교는 그분의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자리였다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기득권자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거예요. 

 

사실 고대 사회의 경제 구조는 구조적으로 그렇게 쉽게 변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제 구조는 특별한 시대 구분을 하지 않아도, 누가 왕권을 갖고, 사제직을 유지하고, 빼앗고, 임명하고, 사회 주도권을 누가 갖고 있느냐? 이거에 관계없이 그에 따른 시대 구분 없이 큰 차이가 없었다라는 것이죠. 그만큼 고착화되어 있는 경제 구조였다. 나쁘면 나빠졌지 바뀔 개선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가진 자는 더 갖고, 없는 자는 더 뺏앗기는 빈곤의 악순환만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이죠. 

 

고대사회의 경제 구조는 구조적으로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갈릴래아와 유다 지방은 로마제국에 합병이 돼서 두 지역으로 분리되어 있던 로마제국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합병은 팔레스티나의 경제 구조 자체가 바로 로마제국의 경제 구조에 강제로 편입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거지요. 하지만 그 현실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농부나 어부, 소작인들, 종, 품삭일꾼, 세리와 같은 하층민들은 이미 경제적으로 빈곤해 있었고, 로마제국이 부여한 세금 때문에 더욱 가혹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팔레스티나의 경제는 농업 위주였습니다. 그런데 유다 지방은 메마른 사막 지대인 박토였기 때문에 자급자족이 불가능하였고, 토양이 기름진 비옥한 갈릴래아 지역의 곡물에 의존하였습니다. 여러분 팔레스티나는 아주 작습니다. 남북의 길이가 약 563km예요. 동서의 폭은 약 좁은 곳이 30km이고요. 그나마 넓은 곳이 97km입니다. 평야지대, 산악지대, 사막지대가 골고루 있지만 비옥한 땅은 지중해 연안에 해안 평야지역 그리고 내부로 들어갈수록 평야가 매우 적습니다. 

 

 

그나마 서부 산악지대의 갈릴래아 저지대, 요르단 협곡 주변의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는 경작할 땅이 있었어요. 여기에서 나는 곡물이 유다에 있는 사람들이 그 갈릴래아 곡물에 의존했다는 것이죠. 특히 갈리래아 저지대 중 이즈즈엘 평야가 팔레스티나 땅 가운데에서도 특히 곡창지대에 속했습니다. 여기에 로마제국에게 점령당하면서부터 더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도 로마제국에 점령당하기 전에는 갈릴래아 토지가 자작농들의 소유였고요. 자작 농업 방식으로 경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산물은 물물 교환으로 거래가 되었지요. 

 

* 대지주 제도 : 소수의 대지주가 토지를 소유하는 제도 

 

하지만 로마에 점령당하면서부터 팔레스티나에는 새로운 토지 소유의 형태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대지주라는 제도가 생겼어요. 즉, 소수의 대지주가 많은 토지를 소유하는 제도였습니다. 대지주들은 국왕의 비호를 받아 힘으로 빼앗거나, 권력으로 몰수해서 많은 토지를 갖게 되었던 거죠. 그리고 그 많은 토지는 땅을 갖지 못한 소작인들이 경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도 안에서는 땅을 갖지 못한 소작인들이 자기가 생산한 질 좋은 곡식과 수산물을 전혀 가질 수 없게 되었던 거죠. 이런 변화는 결국 불안을 일으키게 되는 요인이 되었고요. 

 

최악의 경우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경우, 소작할 수 있는 여건도 안 되면 결국 그들이 떠돌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떠돌이가 되더라도 그마나 일자리를 갖게 되면 토지를 경작해서 수확물을 차지했던 소작인들이 이제는 자신의 생존권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죠. 게다가 로마제국의 농민들은 수확의 50퍼센트를 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세금으로 빼앗겼던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제국에서도 세금을 내지만 또 로마제국이 직접 거둬 들이지 않고 대리인들을 두죠. 그것이 바로 세리들인데, 세리들도 로마제국에 넘기면서 지가 몫을 챙겨야 되기 때문에 정작 소작인들에게 돌아갈 것은 더 없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더 어려운 집안 살림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헤로데 대왕에 의해서 성전을 재건축과 그리고 활성화된 도시 경제 위주로 발달하게 되면서 도시에 있는 돈 많은 사람들, 대지주들. 그래서 이들이 갈릴래아 저지대의 땅을 소유하는 부재지주의 격증과 함께 토지가 계속 부농에게로만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사회적으로 마비되어 있었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 부재지주(不在地主) : 땅이 있는 곳에 살지 아니한 땅 임자 

  농지를 다른 사람에게 임대해 주고 그 소득의 일부를 차지하는 지주

 

사실 이스라엘에는 토지를 돌려주는 안식년이나 희년 제도가 있었어요. 여러분들 레위 25,1-22절을 꼭 참고로 읽어 봐 주시기 바랍니다. 안식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7년마다 토지를 쉬게 할 목적으로 정한 제도이지요. 토지가 바로 하느님의 소유라는 개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7년마다 안식년을 지내면서 그 해에 동족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고, 노예를 해방하고  땅을 쉬헤 하는,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이 희년을 7번 해서 49년이 지난 다음에 기념하는 희년 제도를 또 지내게 되었던 것이죠. 이런 안식년과 희년 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 안식년, 희년  제도(레위 25,1-22)가 실시되지 않음

 

그렇습니다. 유다인들에게 땅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느님의 약속,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세와 맺은 계약이 있죠? 여기에 꼭 들어가는 것이 있어요. 바로 땅입니다.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 팔레스티나는 일찌기 주 하느님과 유다인이 계약을 맺으면서 하느님께서 유다인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대한 이 약속의 개념이 달라진 거예요. 대지주 제도는 땅에 관한 이러한 근본 개념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 대지주 제도는 땅에 대한 이러한 근본 개념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땅에 대한 약속을 정면으로 부인하면서 가혹한 세금으로 백성들을 쥐어잡던 로마제국의 식민 정책도 물론 있었지만, 땅의 진정한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기억했던, 이런 레위기에 나오는 안식년, 희년 제도가 권력과 야합한 도시에 살던 상류층들 즉, 부농에 의해서 거부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였던 거죠.

팔레스티나에는 원래 자작농과 그에 따른 소작인이 많았지, 이렇게 부농이 많아지고 소작층이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은 로마제국 하의 식민 정책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더욱이 유다 지방은 기후가 굉장히 나빴습니다. 우리처럼 뚜렷한 사계절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팔레스티나의 토양은 대부분 물을 머금지 않고 쉽게 통과시켜 버리는 석회질이고  또 돌이 많은 편이어서 사실상 농사 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조건이었습니다. 여기의 계절은 건조하고 비가 오지 않는 따뜻한 여름, 건기는 대게 5월에서 10월을 팔레스티나의 건기로 잡습니다. 

 

또 비가 많이 내리는 추운 겨울, 우기는 대게 11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를 우리가 이스라엘의 우기, 추운 겨울로 비가 오는 때라고 보지요. 지역 별로 차이가 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기후적으로도 좋지 않고, 지역적으로도 해안지대, 사막지대, 산악지대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평야가 별로 없고요. 기후적으로도 그리 좋은 땅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비는 우기 또한 전 지역에 걸쳐서 골고루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국지적으로 또 짧게 집중적으로 쏟아져서 1월에서 2월 사이에 강우량의 70퍼센트가 옵니다. 

 

그러다보니 부농들은 자기들의 사업은 물론 소작농의 작물들을 사들였다가 곤궁기에 방출해서 막대한 이익을 보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지요. 그 값을 평균치의 16배를 넘게 받았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어요. 결국 도시인이며 상류계층에 속하는 이 부재지주들은 소작인 농민들에게 농노처럼 농지를 관리하게 하면서도 관리를 맡아 온 몸으로 농사를 지으며 수확을 거둔 소작인들은 오히려 지주에게 계속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작 농민들은 대주지에게 고용된 일꾼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들은 대개가 세금을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토지를 빼았겼고, 그래서 소작인의 신분으로 전락해 버린 사람들이예요. 마르코복음에서 이런 모습은 12,1-9절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아주 잘 드러납니다. 하나의 우화인데 이것이 당시의 팔레스티나 경제구조를 그대로 잘 드러내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토지를 빼앗기고 하릴없이 남의 토지를 부쳐 먹게 된 소작농민들도 산출 기준에 따라 부과된 세금을 로마 제국에 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 농지의 절대량이 부족해서 자작농보다 소작층이 다수인 그런 상황 속에서 그 자식들은 품팔이로 나가야 했고, 일자리가 없어지면 자동적으로 떠돌이가 되는 그런 현상이 발생했던 거죠. 당시 날품팔이 노동자의 기본 품삯은 그것으로 한 가족이 살아가는 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농촌에서의 일자리는 줄고 도시로 몰리는 이농현상이 급속도로 확산하기에 이르렀죠. 

 

반면 왕족들과 대사제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대지주 계급은 넓은 땅과 권력을 차지하며 충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겁니다. 여기에 세력권에 붙어 있는 층도 포함이 되는데요. 저명한 랍비 계층에서 대지주로 알려진 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 한 랍비의 일 년 수확은, 예루살렘 시민이 10년 동안 먹을 정도의 것이었다는 기록도 있고요. 어떤 사람은 고을 천 개와 배 천 척을 소유했다는 기록도 있고, 성전에 바쳐지는 십일조가 송아지 만 삼천 마리였다라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전승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대지주 계급은 소농에게 토지를 담보로 종자 또는 돈을 빌려주고 기일 내에 갚지 못하면 가차없이 토지를 합법적으로 뺏는 일이 흥했었어지요. (약은 집사의 비유 : 루카 16,1-13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루카 12,16-21) 그렇게 토지를 빼앗긴 농부를 할 수 없이 자신의 가족들을 노예로 팔게 되고 이렇게 신분상 노예가 아닌 노예가 증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 경제 구조, 사회 계급 구조를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이제 마르코복음 본문에 들어가면 더 자세하게 읽고 묵상하며 알게 되겠습니다만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여기서 생각하게 되지요.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2코린 8.9 참조) 우리는 바로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되시어 언제나 가난한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 곁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며 증거하는 신앙인입니다.

 

* 마르코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보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특성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우리 믿음 역시 사회에서 가장 방치된 이들의 온전한 발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요. 특별히 우리가 읽고 묵상할 마르코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당신의 인간적 특성을 잘 보여주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강조된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들 중에서 아픈 이들과 굶주린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가지셨던 목자의 마음, 그 가엾은 마음이야말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하신 미 마음이 바로 우리들이 지녀야 될 신앙인으로서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모습을 이제 여러분들 마르코 본문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가 한 번 확인하고 또 우리도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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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박기석신부, 팔레스티나, 바리사이, 사두가이, 대사제, 율법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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