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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기석 신부 / 마르코복음의 저자, 집필 장소, 시기, 복음의 구조와 내용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12 조회수4,125 추천수1 반대(0) 신고

박기석 신부의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제5강 마르코복음의 저자, 집필 장소, 시기, 복음서의 구조와 내용

 

안녕하십니까?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입니다. 오늘과 다음 주까지는 두 주간에 걸쳐서는 마르코복음서를 시작하기 전, 지난 시간까지는 전체적인 개요라면 오늘과 다음 주는 마르코복음서에 관한 개요를 2주에 걸쳐서 여러분과 함께 살펴봅니다. 

 

말씀드린 대로 마르코복음은 신약 성경 27권 가운데 이 중 네 개의 복음서 중 두 번째 자리에 놓여있지요. 하지만 쓰여진 순서로 하면 제일 먼저 저술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라고 하는 의미는 문학 유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첫 본보기, 원복음서이지요. 

 

* 마르코 복음서 : 원(原) 복음서

 

하지만 마르코복음서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73권의 신·구약 성경 중에서 예를 들면 구약의 창세기, 시편, 아니면 신약의 마태오나 루카처럼 신자들이 꼭 읽어보고 싶은 그런 성서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성서의 요한 복음의 대가이신 레이몬드 브라운 신부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어떤 면에서 마르코는 가장 어려운 복음을 남겼다. 마르코복음은 신학교 과정 중에서 빈번히 가르치는 과목 중 하나이지만 그리스도인들, 그 중에서도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4개의 복음서 중 가장 생소한 복음이다." 

 

마르코복음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주일 독서로 거의 읽혀지지 않았어요. 공관복음상으로 일치하는 성서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별로 인용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교회의 복음서라고 일컬어지는 마태오복음은 즐겨 인둉되었습니다. 그만큼 신자들이 읽기에는 마태오복음서가 편했다는 얘기예요. 

 

그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오늘날 전례력이라는 것이 갖춰지면서 A,B,C 또는 가,나,다 특히 B(나) 해에는 주일 복음 말씀을 우리가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읽게 되지요. 여기서 우리가 이제 마르코복음과 친숙해졌습니다만 그래도 어렵다라는 이야기예요. 왜 그럴까? 마르코복음의 간결함 또 이야기의 갈등 그리고 복음의 주제들은 그 자체로 독자들로 하여금 어려움을 겪게 한다는 것입니다. 

 

* 마태오복음 : 논리 정연한 친절한 가르침 

* 요한복음 : 신학적 웅장함

* 루카복음 : 예수님의 부드러움(자비와 용서) 

 

특히 요한복음의 어떤 신학적 웅장함, 루카복음이 담고 있는 예수님의 부드러움, 자비와 용서라고 하는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부드럽죠. 마태오복음의 어떤 논리 정연한 친절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들. 이런 것과 비교했을 때 마르코복음의 어려움이 더욱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마르코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복음을 시작해요. 

 

* 마르코복음 : 갑작스런 시작과 수수께끼 같은 결론. 이야기 구조상 매우 빠른 전개 

 

그래서 사자를 상징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갑자기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함께 갑자기 시작되잖아요. 그런데다가 매우 수수께끼 같은 결론으로 독자들을 놀라게 합니다. 게다가 이야기 구조상 매우 빠른 전개로 독자들을 압도하고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그분의 행적을 위주로 기술한 마르코는 세련되지 못한 문장과 어휘  또 연결이 서로 잘 맞지 않는 문맥의 불연속성 등으로 인해 짜임새가 허술해 보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감추어진 메시아 비밀, 그 비밀이 예수님의 행적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서서히 밝혀지는 생생한 예수 사건의 증언록이라고 하겠습니다. 

 

* 마르코복음 : '메시아 비밀'이 예수님의 행적과 십자가 죽음, 부활 안에서 서서히 밝혀지는 생생한 예수 사건의 증언록 

 

그래서 마르코복음의 역사적 배경과 그에 따른 몇 가지 주제들을 여러분과 함께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은 마르코 복음서의 구조와 그 구조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토대로 발전되는 마르코복음서의 신학적 주제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살펴볼 주제들, 십자가 신학, 메시아 비밀인 십자가 신학과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제지론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이런 주제들은 마르코복음서의 어떤 공동체의 상황을 즉,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지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 과연 그분은 누구이신가? 자신이 전해들은 바를 바로 이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밝히고자 사용했던 마르코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 속에서 다시 그려내는 마르코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보존하는 데에 성공한 첫 번째 씌어진 복음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 마르코복음 :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1,1)를 생생하게 보존하는 데에 성공한 첫 번째 씌어진 복음서 

 

누가 썼는가를 먼저 볼까요? 기원후 4세기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는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에 따르면 신약 성경 27권 가운데 네 개의 복음서 중 두 번째 자리에 베드로의 시종 혹은 통역관인 마르코가 쓴 복음을 놓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와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1베드 5,13)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마르코복음의 저자 이름을 처음 밝힌 사람은 소아시아 지방의 히에라폴리스의 주교였던 파피아스였습니다. 

 

* 마르코복음의 저자의 이름을 처음 밝힌 사람: 소아시아 지방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 (60-130년경)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는 자신의 저서 교회사에서 파피아스가 요한 원로에게 들은 바를 전하고 있는데요, 베드로의 통역관인 마르코가 예수님에 관해서 사도들에게 들은 바를 기억나는 대로 충실히 기록하여 이 복음서를 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을 여러분들이 자세히 보면, 마르코라는 이름이 10번 언급이 되고 있어요. 

특히 사도행전 12,12절과 12,5절에 보면 요한 마르코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 요한 마르코는 바로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선교 여행을 할 때 동행한 예루살렘 출신 사람입니다. 즉, 여기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식 이름이고, 마르코는 분명 로마 그리스식 이름이예요. 그리고 바오로 서간에 언급된 마르코는 분명 바오로 사도의 협조자였습니다. 그런데 1베드 5,13절에는 이 요한 마르코가 나중에 바빌론 즉, 로마에 있는 베드로의 협조자, 통역관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신약 성경에 마르코로 소개된 인물들이 모두 같은 인물이냐 하는 것 역시 오늘날 의문점에 그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 일치한다라고 할 수 없어요. 복음서의 본문의 내용을 미루어 이 복음서의 저자가 베드로의 통역관이나 바오로의 협조자일 가능성은 큽니다만, 그렇다고 정확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교 문학으로부터 형성된 복음서 저자의 증언은 아마도 경건한 신앙심의 발로라고 여겨집니다. 

 

* 초기 그리스도교 문학으로부터 형성된 복음서 저자에 대한 증언은 아마도 경건한 신앙심의 발로 

 

하지만 전통적인 증언은 역사적으로 다른 의견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예요. 달리 말해서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복음서 저술을 오히려 큰 권위를 지닌 이에게 돌려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차명 집필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마르코라는 이름보다는, 어차피 마르코가 베드로에게 어떤 예수님에 관한 행적을 들었다면 그냥 마르코복음이라고 하지 않고 베드로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더 권위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느냐라고 의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오랜 전승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이렇게 남겨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실성 혹은 개연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지요. 여하간 교회의 오랜 전승은 신약 성경의 이 두 번째 복음서, 첫 번째로 쓰여진 마르코복음서를 위치상 두 번째고, 쓰여진 첫 번재인 이 복음서의 저자를 마르코로 이야기한다는 거죠. 

 

복음의 주요 주제로서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의 수난 부분에 대한 전개는 기원후 64년경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네로 황제의 맹렬한 박해 이후의 상황 즉, 로마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박해를 받던 상황에서 이 복음서가 마르코와 관련되어 쓰여졌다는 데에 넓은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던 이들(제자들)의 수난 부분 

  기원후 64년경 네로 황제의 맹렬한 박해 이후의 로마 상황을 반영 


하지만 반대로 마르코복음서의 역사적 배경을 로마가 아니라 팔레스티나 혹은 시리아 지역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어요. 이들은 로마제국의 박해보다도 동일 지역 안에서 유다인들의 반란과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로마제국의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에 마르코복음서를 더 묶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면서 이스라엘이 멸망하잖아요. 그에 앞서 유다인들의 어떤 세금 문제로 인해서 로마제국에 항거하는 사건들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독립 전쟁과 같은 거죠. 1차, 2차 유다인들의 항쟁이 있었습니니다. 마싸다 항쟁이 바로 그런 것들인데요. 이런 것들과 연결해서 마르코복음의 어떤 역사적 배경, 집필 장소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나 복음서 내용 안에 특히 마르 13장 때문에 이것이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전인지, 후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 것이지요. 여하간 크게는 학자들의 지지는 로마제국의 박해 상황이 아니었겠느냐라고 보고 팔레스티나, 시리아제국보다는 로마에 있는 신자들, 로마에 있는 혼성계 신자들인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이방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고 있던 때가 아니겠느냐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서는 팔레스티나가 아닌 외국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며 쓰여졌다라고 보는 것이 큰 의미에서 맞겠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람어를  쓸 경우 그것을 그리스어로 번역해 주고 있고요. 그런 것들의 예가 뭐냐 하면, 예를 들면 "소녀야, 일어나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치유할 때 아람어 "탈리타 쿰!" 이런 표현을 번역해 준다는 거죠. 또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다 이렇게 해석해 주는 경우 이런 것들이 그런 예라고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인들의 관습을 설명하고 있고, 팔레스티나 지리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어요. 11절 17절에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마르 7,24-30), 로마 백인대장의 신앙고백 (마르 14,39),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을 신앙인의 모범으로, 이방인을 신앙인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들을 본다면 이 복음이 다른 민족들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노력이 잘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책이 팔레스티나 밖에 사는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하겠습니다. 


* 마르코복음 : 팔레스티나 밖에 사는 비(非)유다인들을 대상으로 시사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팔레스타인 밖 어떤 곳, 로마나 시리아 등에 세워진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했던 사람이 기원후 70년경에 이 복음서를 집필했으리라고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 마르코복음서 :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했던 사람이 기원후 70년경에 집필한 것으로 추측 


자, 복음서 중 제일 먼저 쓰여지고 그러기 때문에 마태오나 루카가 참조한 가장 중요한 사료인 마르코복음서는 우아한 문체와 표현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마르코는 자신이 알고 있던 것들  또 자신이 발견한 전승을 어떤 하나의 명확한 틀 안에 맞춰 넣으려고 했다는 거예요. 즉 마르코의 언어와 표현은 매우 단순하고 또 원시적이어서 그 문장 구조가 여러 문장이 '그리고' 희랍어로 '카이'라고 하는데요. '그리고'로 계속 연결되는 동등 복합문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 마르코복음서 : "그리고 즉시(곧바로)' 연결 부사 자주 사용. 이야기의 전개 속도 빠름


여기에다 마르코가 가장 나름대로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 있어요. '곧바로, 즉시' 앞서 그리고와 곧바로를 연결하면 '그리고 즉시, 그리고 곧바로'라는 말이 되지요. 자, 이런 표현을 즐겨 쓴다는 거예요. 이렇게 연결 부사를 자주 사용해서 이야기의 전개를 빠르게 가져간다는 거죠. 이처럼 '즉시, 곧바로'라는 부사를 자주 쓰면서 필요 이상으로 '작은 말' 예를 들면 아까 '탈리타 쿰'에서 나오는 식으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그냥 딸이라고 하면 되는데 '어린 딸' 이런 표현을 쓴다는 거죠. 


그래서 마태오나 루카는 마르코의 용어와 표현을 좀 더 우아한 그리스 말로 곧잘 바꾸어줍니다. 또한 마르코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에 비해서, 마태오나 루카복음서에 비하면 분량이 적지요.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마르코가 복음서를 집필할 때 자신이 얻은 사료들을 별 생각 없이 나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오해를 낳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르코는 분명히 자신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 전하고 싶은 신학적 사상이 분명히 있었고, 그 의도에 따라 복음서 구조와 내용을 엮어갔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마르코복음이 가장 짧은 복음서가 된 것도 아무런 주관적 편집이나 첨가 없이 단순히 사료를 나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입수한 사료가 다른 복음서 저자들에 비해서 그 경우가 적었을 뿐이다라는 것예요. 아무 생각 없이 짧게 그냥 쓴 것이 아니라,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적었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적은 정보량을 통해서도 마르코는 자기가 전하고 싶은 신학적 메시지를 잘 엮어 나갔다라는 것.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요, 마르코복음에 대한 특정 시대적 상황과 저자에 대한 부분적 가능성을 지닌 몇몇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마르코복음의 저자와 시대적 상황을 숙고할 때 다음의 네 가지 상황을, 확실한 정보들이야말로 마르코복음서를 읽게 될 독자들이 꼭 인식해야 된다는 것이죠. 


첫 번째는, 마르코는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당시의 세계상과 로마제국의 정부 그리고 로마제국의 언어 즉, 라틴어 등에 익숙하였다는 것. 


두 번째는, 마르코와 그의 공동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갖고 복음서를 집필하고 이를 위한 자료들을 조사했다. 


세 번째는, 박해, 수난 그리고 실패의 체험은 공동체 내의 긴장과 갈등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네 번째는, 로마제국에 대한 유다인들의 독립전쟁 기간 (66-70년경) 중 예루살렘 파괴와 그에 따른 예루살렘 함락(70년)을 마르코와 그의 공동체의 체험을 어느 정도 연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체험과 즉, 역사적 상황과 연결시킬 수 있다는 거죠. 물론 곧 일어날 상황인지 아니면 이미 끝난 사건인지 이것은 애매모호합니다만 이런 네 가지 틀 안에서 저자와 시대적 상황을 우리가 분명한 사실로 인정할 수 있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런 저자와 역사적 상황을 바탕으로 이제 복음서 내용, 구조를 좀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20세기 초반의 많은 성서 학자들은 마르코복음을 마치 느슨하게 실에 엮어 놓은 진주 목걸이와 같다. 그런 진주 목걸이처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의 단순한 모음집으로 보려 했습니다. 실 하나에 대충대충 이야기를 갖다 끼워놓은 것처럼 느슨했다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그리고 다른 학자들은 마르코복음이 독자들에게 내용이 빈약한 예수님에 대한 역사를 전해준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성경 주석 학자들은 제한적으로 마르코복음에 대해 이 두 가지 성격을 적용시키려 하지요. 

 

* 마르코는 창조적이고 사목적인 신학자!!!

 

하지만 마르코는요 여러분들, 역사가도 아니고요, 단순한 자료 수집가도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르코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주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세심하게 복음을 엮어내려고 했던 창조적인 신학자라는 거죠. 자, 왜 그런가를 보겠습니다. 마르코복음은 마태오나 루카처럼 예수님 탄생 이야기가 없습니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 없이 시작하고 있어요. 세례자 요한의 외침과 간략한 예수님의 세례 장면 그리고 광야에서 유혹 받으심으로 복음서를 시작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체포와 함께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시작으로 이어지지요. 

 

*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없이 시작 


예수님께서 갑자기 처음 인간으로서 첫 목소리를 이렇게 장엄한 메시지를 던져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 그래서 사자와 같다라는 거예요. 이런 메시지로 갑자기 시작하고 있다라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이 선포 다음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부터입니다. 1장 16절 이후부터죠. 


마르코복음은 달리 말해서, 마르코복음의 저자는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의 본질과 그 나라를 정식으로 시작하는 데에 있어서 예수님의 역활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그 장면 장면마다 독자들에게 전혀 숨돌릴 여유조차 주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빠르게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지? 이 말씀이 무슨 뜻이지? 이것을 헤아려 볼 수 있는 틈을 주지 않고 굉장히 빠르게 전개해 나간다는 거죠. 


*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본질과 예수님의 역활을 밝힘!


그런 가운데서 오히려 더러운 영과 마귀들만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다는,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자렛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십니다."(마르 1,24) 더러운 영이 이렇게 얘기하죠.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장면과 이러한 이야기에서 구마치유, 악마를 쫓아내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장면, 그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마귀들, 더러운 영들의 강한 힘, 좀 더 구체적으로 마르코복음 5장 9절에서는 이 마귀들을 '군대'라고 표현하고 있죠. 이 더러운 영들과 대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들과의 갈등, 충돌을 일으키시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비록 역설적이지만 이 갈등과 충돌, 이 분열이야말로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극적인 단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더러운 영을 쫓아내심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잖아요. 그 모습, 하느님 나라의 도래,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모습이 이 세상의 주도권이 바뀌었다, 악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이 지배하시는 곳,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고 계시는 곳이라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 군대라는 더러운 영들과의 갈등, 충돌, 분열 

   ⇒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극적인 단서 


그래요, 마르코복음의 이야기는 8장, 시몬 베드로의 그리스도의 고백을 전하는 8,27-30절이 내용상의 하나의 전환점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분량적으로도 딱 중간이고 내용상으로도 전환점이라는 거죠. 물론 이것은 전체 마르코복음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요.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 이후 뒤따르는 장들 안에서 즉, 복음서의 후반부에서 마르코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즉, 세 번에 걸쳐 되풀이 되는 가르침인데 바로 예수님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 마르코복음의 새로운 가르침 : 예수님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로 시작 

-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 (마르 8,31-33) 


* 마르코복음의 새로운 가르침 : 예수님의 "죽음 예고 "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죽으심 

-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마르 9,30-32)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당하고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져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죽으실 거라는, 예수님의 이 예고를 통한 자신의 메시아적 지위에 대한 정의로 제자들의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게 됩니다. 수난에 대한 예고에 이어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삶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길을 받아들여 걸어가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 예고와 함께 그 수난, 죽음, 부활에 제자들도 함께 따르도록 새로운 가르침을 주신다는 거죠. 


이 새로운 삶의 길이란 그들이 생각했던,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영광, 권력을 얻는 그런 것이 아니라, 부와 특권에 대한 다른 태도를 지니라고 하는 것이죠. 이 점을 강조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심지어 죽음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강조하셔요. 마르 8,34-38 ; 9,35 ; 10,35-45 참조.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마르 8,34-35) 또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그리고 10,35-45에서 아주 결정적인 말씀을 하시죠. 


* 출세와 섬김 : 마르 10,35-45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이게 속량이라는 개념이거든요. 결정적인 말씀이예요. 예루살렘 입성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강조했던, 우리들의 죄 값을 대신해 당신 자신을 바치겠다는 말씀을 강조하십니다. 즉, 우리도,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려면 이것을 받아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해서 이야기는 11ㅡ13장 즉,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로 대변되는 예루살렘 당국과 대면하고, 묵시적 언어로 성전과 도시의 파괴를 내다보시는 11ㅡ13장에서 더욱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 13장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 그러니까 그 역사적인 성전 파괴를 보았는지, 그 전인지, 이미 겪고 난 후인지 아까 말씀드렸었죠. 이것이 이제 13장에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14-15장, 드디어 최고 절정을 맞이합니다. 결국 반대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체포되시고 최고 의회와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십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사형선고를 받으시지요. 이런 최고조의 장면들 안에는 엄청난 긴장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반대자들과의 갈등은 물론 십자자에 못 박으라는 거듭되는 군중들의 외침, 또 가장 가까웠던 제자들도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모습, 심지어 십자가 형에 달리셨을 때도 그 자리에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마르코는 예수님의 버려짐 즉, 전적인 유기 상태, 전적인 버려짐의 상태를 아주 자연스럽게 강조하는데,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이는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르 15,34) 


자, 예수님의 이 외침은 그야말로 버려진, 유기 상태의 제일 밑바닥에서 울부짖는 그런 소리입니다. 시편 22편의 서두이기도 하죠. 이 외침은. 이 부르짖음은 예수님께서 겟쎄마니 동산에서 아버지께 드렸던 그 기도, 그 간절한 예수님의 호소보다도 더 비참하고, 강하고 애절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겟쎄마니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십자가에 달리셔서는 아버지라 안 하고 하느님이라고 하잖아요. 그만큼 애절하고 철저하게 버려졌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비참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이 어둠의 절정에서 예수님은 시편 22편을 인용하시면서 외치십니다. 하지만 이 울부짖음은 두려움, 공포감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영원히 머물겠다고 하는,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겠다고 하는 희망으로써 믿음의 응답이기 때문에 희망의 언어임을 여러분들이 반드시 염두에 두셔야 돼요. 공포감에서, 버려졌다는 것에 대한 것으로 우리가 보여질 수는 있지만, 그 너머 부활이 있기 때문에 희망의 언어라는 거죠. 조금 전에 "하느님께 맡깁니다."는 희망의 언어라는 의미입니다. 


자, 이렇게 마르코복음의 결말은 많은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자아내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발현과 연관된 대단한 이야기를 기대했을지 모를 사람들에게 마르코복음사가는 오히려 거기에 대한 설명을 여인들과 함께 남겨진 빈 무덤 그리고 천사의 형상을 한 한 젊은이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리고 젊은이는 여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죠.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 (마르 16,6-7)


하지만 여인들은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해요. 젊은이의 말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마르 16,8) 자, 소위 마르코복음의 긴 말미와 짧은 말미라고 일컬어지는 두 개의 결론은 이렇게 16,8절이 너무 갑작스러운 끝맺음이라고 생각한 후대의 필사자들에 의해 추가로 끼워 넣어진 결과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마르코복음이 원래 16,8절로 끝났는데, 9-20절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 아니냐? 그래서 긴 말미, 짧은 말미, 이렇게 학자들이 좀 구분을 짓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마르코복음의 본래의 결말은 초기 단계에서 잃어버렸고, 16,8절에서의 끝맺음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거지요. 물론 그 반대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 마르코복음의 두 개의 결론 

- "긴 말미" (long ending) 마르 16,9-20 

- "짧은 말미" (stoter ending) 마르 16,8 

 

하지만 오히려 마르코복음 16,8절의 결론이 마르코복음의 전체의 모습을 잘 담고 있는 것이 아니냐? 왜냐하면 전체 복음 안에서 제자들이 늘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못했거든요. 그런 어리둥절하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오히려 잘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마르코복음 16,8절에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16,8절은 로마이건 시리아이건 박해에 직면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확신의 징표로서 두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보여집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두려움과 그 무지 속에서도 심지어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배반과 실패 속에서도 부활은 이루어지고 선포되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렇게 활동하신 다는 거죠.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오늘 이 5번째 강의는 이렇게 마르코복음의 저자, 집필 장소, 시기 그리고 마르코복음의 구조와 내용을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 흐름에 따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은 다른 내용들로 마르코복음의 개요를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박기석 신부, 마르코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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