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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첫 기적의 의미)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12 조회수1,612 추천수1 반대(0) 신고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

첫 기적의 의미

찬미예수님.

한 주일 내내 편안하셨습니까?

개신교에서는 술을 보편적으로

안 먹는데 이유를 아세요?

성경에 술 먹지 말라고 나와 있어요?

아닙니다.

개신교가 술을 금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문화에요,

100여년 전 조선 땅에

우리 천주교는 200년 전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왔어요.

그 개신교 선교사들이 주로

퓨리탄(Puritans), 청교도들이었어요.

아주 엄격주의.

그런데 와서 보니 농사철 끝난

겨울이면 밀주를 담가 먹고

담배 연기 속에서 화투하며

예배당에도 안 나오고.

정신 못 차리는 것에요.

그때부터 술은 곧 마귀다,’

그런 게 내려 온 것에요.

천주교도 개신교에 맞서

리걸리즘(Legalism)이라고 해서

아주 엄격한 시절이었죠.

옛날 서양 신부님들

정말 무서웠잖아요?

나도 어릴 때 서양 신부님한테

매도 맞고 고백소에서

무서워서 오줌도 쌌어요.

첫 영성체후 고백소에 들어갔는데

얼마나 무섭습니까?

기도문도 다 까먹었어요.

생각이 하나도 안 나.

고백소 안에서 신부님이 말해요.’

그 말 하니 더 못 하겠어!

그러자 커튼을 채치고

솥뚜껑만한 손이 나오더니

철썩하고 때렸어요.

지금 내 기억에도

우리 할아버지가

회초리 맞는 것도 기억해요.

이렇게 천주교가

엄했는데도 불구하고 술 담배

먹지 말라는 얘기는 안 했죠.

이 세상에 모든 음식은

사람에게 해 끼치는 것이 없어요.

라틴어 교본에도 우리 한자 있을

(), 유는 선하다고 그래요.

독사도 가만두면 해를 안 끼쳐요.

자기 잡으려는 줄 알고

살려 무는 것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이에요.

개신교 신자들이

술담배 먹지 말라는데,

그건 법이라기보다는 문화입니다.

물론 술이 사람을

죄로 이끌 수 있죠.

이태백 시조에

한 잔 술은 사람이 먹고,

두 잔 술은 술이 먹고,

세 잔 술은 술이 사람을 먹는다.’

라고 했죠.

술한테 사람이 먹히면

개짐승이 돼서

죄로 이끌어 가는 거죠.

하지만 죄로 안 떨어질 때도 있죠.

분위기가 어색한데

술이 한 잔 있으면 대화가 되잖아요?

그때는 술이 사랑의 매개체,

윤활유가 되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

첫 번째로 한 기적이

물을 술로 만드는

가나안의 기적이죠.

오늘 복음 마지막에

이 기적을 보고 제자들이

믿기 시작하였다고 나옵니다.

! 물이 술이 됐구나!’

그래서 천주교 술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기적이 바로

오늘 기적이에요.

그러나 이 기적은 단순히

술을 숭배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르쳐주는 기가 막히는

내용들도 가득 차 있습니다.

첫 단추가 중요하듯

첫 기적이 중요해요.

첫 기적이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가를 우리들이 묵상하면,

메시아가 어떤 분이고,

기적이 일어나려면

내가 어떤 처지에 있어야

하는가를 압니다.

우선 첫 번째로 이 사건이

일어난 때를 중시해야 합니다.

장례식이나 명절 동네 마당서

놀고먹을 때가 아니라

혼인잔치 때 일어난 것에요,

, 기적은 기쁨의 때에 일어나요.

기적은 평화로울 때 일어나요.

기적이 일어난 때는 바로

울며불며 하는

장례식 때가 아니었죠.

물로 예수님은 장례식 때

죽은 이도 살려주지만

첫 기적은 기쁨의 때에 일어났어요.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혼인잔치 때 끝까지 머무르십니다.

예수님은 너무 엄격해서

본인 자신이 흥을 깨는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가서 앉아 있는 시간을

차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는 곳마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침울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유희와 행복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종교인들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우울한 그림자만 남겨요.

따라 해보겠습니까?

우울한 성인은 없고

기쁨에 찬 마귀도 없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성인들은 우울하게

살다간 성인은 없어요.

우울한 장소에 그 성인만

들어가면 웃음꽃이 펴요.

유머가 있고, 위트가 있죠.

굳어져 있거나

경직이 되어 있지 않았어요.

모든 이의 모든 이가 되려고

애를 쓴 거죠.

그러나 마귀가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장까지 한다 해도 못하는 것이

딱 하나가 있죠.

마귀는 웃을 줄 몰라요.

마귀는 기뻐할 줄 몰라요.

늘 교만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웃지를 못해요.

보통 제가 피정 나가면

6시간을 강의합니다.

오전에 2시간, 오후에 3-4시간.

그 시간 동안에 저는 적어도

20번 이상을 웃게 만들고,

적어도 5번을 울게 만들어요.

? 말씀 안에서 웃고

우는 것도 치유이기 때문에.

그런데 강의 내내 한 번도 안 웃고,

나와 원수가 졌는지

째려보는 분도 있어요.

알고 보면 그게 웃는 얼굴이에요.

평소에 웃어보지 못한 사람은

본인은 웃는데,

앞에서 보면 헐크처럼 바뀌어요.

평소에 많이 웃는 사람은

눈꼬리에 주름이 생기죠.

인상 쓰면서 생기는 주름과

웃으면서 생기는 주름은 앞에서 보면

차원이 달라요.

우리들도 다른 사람이 기뻐할 때

기뻐해야 됩니다.

슬퍼할 때 슬퍼하는 척이 아니라

정말 슬퍼해줘야 합니다.

없는 자와 어울릴 때는

그들처럼 살아야 됩니다.

아기들과 어울릴 때는

아기처럼 단순해야 되고,

노래할 때는 노래 불러줘야 되고,

춤춰야 할 때는 같이 춤춰야 됩니다.

술 마실 때는 같이 술 마시는

따스함이 있어야 됩니다.

한마디로 사랑의 분위기를

깨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이의 모든 이가 되려고

애를 써야 돼요.

예전 시골 본당 신부할 때

군수가 구교 후손 교우였어요.

하루는 군수로 종교행사로

절에 가면 절을 해야

되는지를 묻더군요.

내가 뭐라고 답을 했겠어요?

하세요. 당신이 뻣뻣하게 서 있으면

분위기가 얼마나 이상해.

불상에 절하면서,

하느님이 동양에 파견한 성자.

석가모니를 파견한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절 하세요.

절하면 사람들이

우리 군수님 열려있는 분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었죠.

영혼을 구하려면 밝고 명랑해야 돼요.

그 모습이 경거망동 하고

허풍을 떠는 수다쟁이가

되라는 말은 아닐 겁니다.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단죄하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희노애락을 같이 겪으셨습니다.

모는 이의 모든 것이

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기적이

일어난 장소를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첫 기적의 영광을

드러내신 곳은 회당이 아닙니다.

사람이 수천 명이 모여 있는

대집회가 아니라 소박한

갈릴리의 한 가정입니다.

여러분들이 자기 집에서

기적을 발견 못하면

이 세상 어디 가서도 못 찾습니다.

온 식구가 저녁에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것 보면

기적 아닙니까?

온 식구가 아침에 눈 뜨고

화장실 들어가는 것 보면

기적 아닙니까?

한밤중에 죽는 사람,

아침에 인사하고 나갔다가

응급실에 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집에서 은총을 발견 못하고

기적을 발견 못한다면

어디서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가정적인 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가정이라는 바로 이 장소에서

묘한 태도를 보입니다.

세상에서 가정보다 더 귀중한

장소가 없다는 사실은

여러분들 동의하십니까?

그러면서도 동시에

가정에서는 가족들에게

서로가 굉장히 무례하게 대합니다.

집 밖에서는 너그러운 사람

소리를 듣는데,

집안으로 들어오면

사람이 바뀝니다.

다른 이에게 그렇게

녀그러운 사람이 가족에게

그렇게 차갑고 잔인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본성은 밖이 아니라

안입니다.

집안에서는

꼬라지를 다 알기 때문에

아무리 가면을 써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함부로 대합니다.

너희 신랑, 우리 성당에서 짱 이다.

어쩜 그렇게 시집도 잘 갔니?’

그 자매는 한숨을 쉽니다.

너도 살아봐라. 그 말이 나오나.’

다른 여자에게는 100점을 받는데

아내에게는 빵점입니다.

성당에서는 100점짜리 교우인데

집안사람들은 절대 후하게

점수를 안 줍니다.

여기 지금 찔리는

표정들이 많이 있고,

어떤 자매들은 고소하다는

표정도 있습니다.

나의 장점을 보는 이가

대부분 밖의 낯선 자들이고,

나의 단점을 보는 이가

늘 함께 하는 가족이라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최선을

다해야 하는 장소는

성당이 아니라 가정이에요.

예수님이 자신의 영광을

처음으로 들어낸 곳은

성전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그 가정 안에서 예수님은

많은 일을 하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세 번째로 이 기적이 일어난

이유를 주목해야 합니다.

동방에서는 손님을 초대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날에

포도주가 떨어지면

그 이상의 수치와 모독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후손에게까지

그 수치와 모독을 주홍글씨처럼

쫓아다녔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가장 큰 혼인잔치,

술이 흘러넘쳐야 되는데,

술이 떨어진 것에요.

예수님은 이 작은 갈릴리

가정을 수치의 상처로부터

구하기 위해 능력을 행하십니다.

누구나 이 일을 하면

이익이 올 것이라는 그런 큰 계기가

있을 때는 그 일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하고

보잘 것 없는 이런 경우에도

큰 기적을 하십니다.

세상에는 타인의 불행을 즐기며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가 되시고

영광의 왕이 예수님께서는

비천한 갈릴리의

그 젊은 남녀를 수치와

경멸로부터 구하시기 위하여

메시아로서의 첫 기적을 쓰십니다.

성부로부터 받은 그 능력을

이기적인 것에 쓰는 것이 아니라

이타적으로 씁니다.

제게도 탈렌트(talent)가 있고,

여러분들 모두에게도

탈렌트가 있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손재주가 좋고,

어떤 분은 뜨개질을 잘하고,

어떤 분은 음식을 잘하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는데

우리에게 하느님이

탈렌트를 안 주셨을 리가 없죠.

그 탈렌트를 다른 사람이 힘들어 할 때,

도움을 청하는 사람한테 쓰라는 것에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쓰거나

유세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이 주는

의미를 묵상합시다.

성모님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지 이해하지 못했을 때나,

또 오늘처럼 예수님이

당신의 요구를 칼같이 거절하신 것처럼

보였을 때라도 예수님을 믿으셨어요.

처음에는 아들, 이집의 술이 다 떨어져가.’

그냥 믿었던 것이죠.

그러나 어머니, 제가 해결해 드릴게요.’

답이 아니었어요.

엄마 소리도 없죠. ‘여인이시여.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에요.’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그래도 성모님은 믿으셨어요.

분명히 해결해줄 거라는 것을

믿으셨어요.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으셨기에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시키는 대로만 해.’하셨죠.

성모님은 이해하시지

못하실 때에도 예수님을

신뢰하실 수 있는 분이세요.

어찌 우리들이 하느님을

우리 머리로 이해하겠습니까?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성모님처럼 이해할 줄 없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리고 하느님이 나에게서

떠났다는 느낌을 받았더라도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잉태되실 때에도,

십자가에서 만신창이가 된

아들의 시신을 껴안으실 때도

성모님은 끝까지 믿으셨어요.

신뢰하셨어요.

성모님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내 아들 예수는

무언가 옳게 일을 처리하리라는

확신이 있었지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알지 못할 때가

선명할 때보다 훨씬 많습니다.

예고 없이 닥치는

여러 가지 사건에 그 의미를

알지 못해 허둥거릴 때가 많습니다.

이때 우리는 로마서 828절의

말씀을 외워야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좋고 나쁜 일이

상호작용하여 선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느님에게 사랑이라고 하는

뿌리만 내려있다면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결과만큼은

선하게 만드신다.’

야훼이레

자 오늘 복음을 정리합시다.

단순히 술의 기적이 아니라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될 때

생기는 기적이었습니다.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할 때 생기는 기적입니다.

조건 없이 베풀 때

생기는 기적입니다.

성모님처럼 무조건

예수님을 신뢰할 때

생기는 기적임을 우리들은

믿어야 됩니다.

잠시 후에 복사들이

포도주를 가지고 올 겁니다.

그리고 축성을 하는 순간,

물을 포도주로 바꾼 하느님처럼,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로

왜 못 바꾸겠습니까?

가나안 기적은

오늘 이 자리에도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아멘.

2019년 연중 제 2주일(01/20)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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