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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독서(요나3,1-1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13 조회수1,357 추천수1 반대(0) 신고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독서 (요나3,1-10)

 

 

3장의 내용은 요나가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니네베에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이 임금을 비롯하여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모두 회개하고, 그것을 보신 주님께서 마음을 돌리시어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니네베의 회개는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임금부터 용상에서 일어나 용포를 벗고, 자루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단식'(촘; tsowm; fast; fasting)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는데,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곧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도 좋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하느님 앞에서 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악을 크게 회개한다는 표시이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자 행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니네베 사람들 역시도 죄악을 크게 회개하였고, 장차 철저한 멸망에 이를 수 있는 현실적 정황 앞에서 하느님의 용서와 보존의 은총을 구하여 위기를 타개하고자 단식을 단행한 것이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5)    

 

여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니네베의 왕을 지칭하며, 가장 낮은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비천한 자들, 아마도 노예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일 것이다.  

'자루옷'(굵은 베옷)에 해당하는 '삭킴'(saqim)의 원형 '사크'(saq)조직이 매우 거친 삼베 말한다.

이것은 장례식에 입거나(창세37,34; 2사무3,31) 국가적 재난을 당할 때(에스테르4,1), 극심한 심적 고통을 표현하고자 할 때(2열왕21,27) 입었다. 

 

이처럼 평상시 입는 옷을 벗고 거친 베를 몸에 걸친다는 것은 일체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거부하고,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진심으로 회개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6)  

 

당시 니네베 왕은 아시리아 제국 전체를 통치하던 샬만에셀 4세(Shalmaneser IV, B.C. 782-773),  혹은 앗슈르단 3세(Asshurdan III, B.C. 772-755)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니네베 왕이 주 하느님 앞에 철저히 낮아져 진실로 겸비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는 하느님 대전에 더 이상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왕좌에서 일어나 왕의 권위를 겉으로 드러내는 자신의 왕복까지 벗고, 대신 자루옷을 입었다.

 

그는 왕좌에 앉는 대신에 잿더미위에 앉았다. '재'에 해당하는 '하에페르'(haeper)의 원형 '에페르'(eper)는 흩어 뿌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물질이 완전히 연소되고 남은 매우 가벼운 분말 상태의 찌꺼기인 재(ash)를 의미한다(민수19,10).

고대 근동에서 사람이 재 위에 앉거나 재를 뒤집어 쓰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극심한 육체적, 심적 고통을 나타내거나(2사무13,19;욥2,8),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의 은총을 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 행동이다(다니9,3). 

 

당시 세계 최강의 권세를 자랑하던 아시리아 제국의 최고 통치자가 자루옷을 걸치고 잿더미 위에 앉았다는 것은 아시리아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 누구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서쪽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서 온, 이름없는 한 선견자의 선포를 듣고,  그렇게 했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다. 

 

하지만  아시리아 왕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비천함과  하느님의 심판 대전에 무기력함을 절감하고, 그 모든 권세와 권위를 하느님 대전에 내려놓고,  오직 주 하느님만을 최고의 신으로 인정하는 가운데,그에게 은총을 구했다. 

이러한 아시리아 왕의 태도는 실로 하느님 대전에 은총을 구하는 자, 회복을 간구하는 자가 취해야 할 합당한 태도라 할 수 있으며, 좀 더 근본적으로 하느님 대전에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 누구나

마땅히 창조주  하느님 대전에 취해야 할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온 국민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 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으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3,7-8)

 

고대 근동에서는 나라에 매우 큰 위기가 닥쳤거나 최고 통치자가 서거했을 경우 사람들 뿐 아니라 이성이 없는 우매한 가축들 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하는 관행이 있었다. 

니네베 성읍 전체의 모든 생명체가 멸망의 위기를 벗어나 다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단식을 통해 철저한 회개의 모습을 가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7-8절은 니네베 읍성 백성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한 방법 네 가지가 제시된다. 그것은 음식 뿐만 아니라 물까지 입에 대지 않는 완전한 단식, 자루옷(굵은 베옷)을 입는 것, 하느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 각기 악에서 떠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네번째 사항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즉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8)

바로 이것 때문에 심판이 닥쳤으므로, 백성들에게 악과 폭행을 버리고 선한 길로 돌이키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돌아서야 한다'에 해당하는 '웨야슈브'(yejashubu)의 원형 '슈브'(shub)어원적으로 가던 방향을 돌이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창세8,12).

 

본문에서는 악한 행위와 폭행을 버리고, 과거의 그러한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회개란 단순히 악을 버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데까지 나아가야 완전한 회개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폭행'에 해당하는 '훼하마스'(hehamas)의 원형 '하마스'(hamas)는 어원상 강한 힘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약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죄악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홍수로 멸망당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죄악이었다(창세6,11.13)

어떤 예언서에도 니네베 사람들 처럼 이토록 진지하게 회개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학계 지도자들이 권력과 돈과 지위와 명성을 가지고, 악한 법과 구조와 제도를 가지고, 얼마나 하느님의 신법과 자연법을 거스리며 나쁜 짓을 하고 하고 있는지 모른다. 스스로 하느님의 의노를 초래하고 있는 나라들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높은 데서 권력과 돈을 이용해 불볍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낮과 밤의 다른 생활, 아니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완전히 다른, 철저한 이중생활, 야누스적 생활을 하면서, 감히 서민들이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맛있는 것들을 먹고 마시고, 최고의 사치와 향응과 쾌락과 스포츠를 즐기며, 하느님과 백성들 무서운 줄 모른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통탄할 일이다. 참으로 이 시대는, 임금부터 저기 보이지도 않는 잡초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속속들이 썩어 버린 것을 도려내야 하는, 온갖 부패와 불법과 불의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그래도 하느님의 벌을 받지 않고 망하지 않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께서 남겨두신 이들 때문이다.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희생하며 보속하는 몇몇 의인들과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회개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회개가 정말로 필요한 때이다.

우리 백성들이 아래에서 볼때, 각계 분야의 높으신 분들이, 하느님 대전에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자루옷 입고 잿더미위에 앉아 단식하며, 삶의 자세와 영성을 고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 이곳은 분명 또 하나의 니네베인데도, 아무리 눈 닦고 보아도 그런 분은 보이지 않는다. 회개를 외치는 예언자도, 하느님의 징표를 개닫고 회개하는 분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슬프디 슬프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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