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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93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18 조회수408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2-26

그때에 22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타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묵상에 좋은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요즘 계속하여 마르크복음서를 묵상하며 새롭게 느낀 점은 마르코복음서의 기자는 여러 표징들을 통하여 저희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타 복음서에서의 이러한 표징들은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알리는데 주안을 두고 기술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특이한 점은 예수님과 눈을 치유 받은 사람과의 문답입니다. 그런데 그 문답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치유해 준 사람에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제 무명에서 갓 깨어난 사람에게,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통하여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이 어떠하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하기 이전에 성철스님이 입적하시면서 남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원래 이 말은 선(禪)의 수행과 깨달음의 세 단계를 설명한 法語입니다.   

출가하기 전에 바라본 산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입니다.
그러나 출가하여 바라본 산은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 다시 바라본 산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입니다.

출가하기 전과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 바라보는 산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동일하지만 출가 전에 바라보는 산과 깨달음을 통하여 바라보는 산은 겉모습만 보느냐 아니면 그 본성까지 이해하느냐에 따라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오늘 문답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의 선문답과 비슷한 내용의 대화입니다. 우리 눈에는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별 상관없는 사람들로 보일 뿐입니다. 이런 상태가 오늘 눈 먼 이가 치료받기 전의 상태에서 생각했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므로 자비를 실천할 필요도 못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눈이 조금 뜨이기 시작하면 출가하여 바라본 산처럼 '산은 산이 아니다.' 보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1차 치료를 받은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이 없이 살아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는 나무처럼 보였다는 뜻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복음서의 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며 대답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 어떤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살아있는 고기 덩어리 또는 걸어다니는 나무와 진배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서는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것처럼 즉, 예수님이 2차 치료를 하고 난 다음에는 사람은 어느 누구나 자신과 동등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눈이 조금 떠진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 없는 나무처럼 보이는 것은 측은지심이 생겨나고 있지만 알게 모르게 자신의 우월감도 함께 생겨난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2차 치료로 다시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잘못된 우월감은 이미 사라지고 우월감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오직 측은지심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같은 측은지심이라도 우월감에서 비롯된 측은지심과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깨달은 자비의 측은지심은 또 다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외형적으로는 살아있는 고기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이런 고기 덩어리를 내 자신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자각하게 되면 우리는 생각 없이 살아가는 고기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통하여 노예근성에서 해방되고 인간의 존엄성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깨달으면 우리 모두는 동등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우월감도 사라지고 같은 형제자매이므로 자비의 측은지심이 저절로 생겨나서 사람의 도리를, 형제애를 다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의 치유를 받았으면 이제는 탐욕과는 결별하라는 뜻에서 탐욕으로 가득 찬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더렵혀진 우리 마음을 원래대로 깨끗하게 만들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매일매일 세탁하여 깨끗해진 우리 마음이 탐욕과 거짓으로 다시 오염되는 것은 순간입니다.

민중들은 이런 깨우침을 얻어서 생활 속에서 자비를 실천하는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평신도들은 이 상태에서 더 이상 달리 더 할 방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저 마을로 들어가라" 하셨을 것입니다. 저 마을 사람들도 구원받도록 그들과 함께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민중들과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성직자의 길이고 그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순종이며 성직자가 지녀야 할 덕목입니다.

이처럼 일반 신자들이 가져야 할 덕목과 성직자가 가져할 덕목은 다른 것입니다. 이를 불가에서는 전자를 속제(俗諦)라 하고, 후자를 진제(眞諦)라 합니다. 재가신자와 출가자가 지켜야 규범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하신 말씀은 俗諦를 말씀하신 것이고, "저 마을로 들어가라"제자를 파견하면 순종하는 것은 眞諦라 할 것입니다. 이를 구분하여 복음 말씀을 이해하여야 하고 우리 신앙생활도 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을 덤으로 묵상하였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눈 먼이에게 지혜의 눈을 떠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생각 없이 살아가는 고기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이런 제게 성령님의 지혜를 보내주시어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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