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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81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4 조회수456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를 공부하며 의아하게 생각하였던 것은 예수님은 30세 전후하여 저런 엄청난 지혜를 어디서 얻었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12살 이후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으므로 요한의 제자였을까? 아니면 어느 수도원에서 수행을 통하여 저 많은 깨달음을 얻었을까? 이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있으나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고향 마을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조차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도 이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으므로 지금 저희들이 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오늘 고향 사람들의 말 속에는 예수님은 상당기간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다는 뉘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동,서양의 문명사를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노자나 공자, 인도의 고타마 싯다르타, 그리고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등은 모두 BC 5, 6세기 전후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 인류의 정신사적 문명은 당시 이 분들의 사상에서 오히려 더 퇴보된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 3대 문명축인 중국과 인도, 그리스 사이에 정신사적 문명의 교류가 있었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거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지중해 연안은 그리스 철학이 널리 전파되어 있었으므로 우리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기초가 되는 그리스의 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으로 대표되는 플라톤의 철학은 이데아(Idea)와 에로스(Eros)로 설명되고 있으며 Idea는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완전한 것으로 진선미 그 자체이고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原本으로서 영원불변한 실재적 존재로 인식하였으며 현상계의 모든 것은 그 원본의 모사본(Copy)로 이해하였습니다.

인간 역시 Idea의 모사본에 불과하고 모사본은 원본과 최대한 비슷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며 그 충동을 Eros라 하였습니다. 카피물이나 사진 등의 해상도를 높여서 원본 또는 피사체와 최대한 비슷하게 하려는 욕구가 바로 Eros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인간의 성적 욕구를 Ero로 표현하고 있으나 그 어원은 Eros에서 유래된 것 같습니다.

그리스 철학에 심취하였던 당대의 지식인들은 Idea를 관념적으로만 생각하였으나 우리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Idea로 인식하면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듯합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그리스 철학에 정통한 분들이므로 Idea를 하느님으로 인식하여 신학으로 발전시켜 왔으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예수님의 많은 말씀 중에는 이런 Idea적 요소와 歸一 또는 合一은 Eros적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철학이 신학으로 발전되면서 그리스 철학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르네상스 이후에야 서양은 다시 그리스 철학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대의 지식인이므로 그리스 철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지 않았을까? 최소한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 철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던 분들인 듯합니다. 우리 신앙에서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므로 모든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으로 믿고 있으며 또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신앙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실체적 사실과 일치한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늘의 별을 따서 사랑의 증표로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여 그 약속을 실제로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 약속을 실제로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는 성은 盲씨요 이름은 信者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은 眞씨요 이름은 遵者인 사람은 그 의미를 벌써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 교리와는 다른 두 가지 사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남자 동생은 네 분이며 누이는 두 분이상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맏배는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하는 율법에 따라 예수님은 봉헌되었으므로 예수님은 맏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예언자'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신 말씀과 부합되는 말씀입니다. 예언자는 요즘 의미로는 선지자 또는 선각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 그대로 우리 자신들의 주관적인 신념이며 이를 실체적 사실로 객관화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를 우리 그리스도 교인들이 많이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람되지만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과 실체적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고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묵상에 앞서 서론이 너무 길어진 것 같습니다. 제 짧은 이런 생각들을 신부님께서 지적해 주신다면 겸허히 수용하겠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과 친척들은 옛 기억으로, 그 잣대로 현재의 인물됨을 평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 부인에게 존경받는 남편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악처로 소문난 소크라테스의 부인은 어쩜 가장 정상적인 부인이었을 것입니다.  

선배들은 훌륭한 후배가 있으면 내 후배라며, 내가 많이 가르쳐 줬다는 등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습성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명문집안 출신이 출세하여 돌아오면 대대적으로 환영하지만 자기보다 못한 별 볼일 없는 집안의 자식이 출세하여 돌아오면 시기와 질투부터 하고 있습니다.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그런 잘못된 습성을 고치라는 말씀으로 새겨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불신하였기 때문에 예수님도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는 의미는 불가항력적 요소가 있었다는 뜻이므로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전지전능한 하느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다하신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우리의 자율적 실천의지가 있어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의사를 불신하는 환자에게는 그 어떤 명의도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의사를 전적으로 신뢰하면 수련의도 명의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도, 하느님의 말씀도 아무런 기적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우리의 결의이며 그런 결의가 없다면 그 어떤 믿음을 가진 자도, 그 누구를 불문하고 무늬만 신자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묵상하였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오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진리를 불신하는 사회에서는
그 어떤 기적도 일어날 수 없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모두가 진리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한마음이 되어야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더 이상의 판단 기준이 없음을
저희 모두가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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