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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현문(賢問)과 우답(愚答)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4 조회수426 추천수5 반대(0) 신고
 

 

현문(賢問)과 우답(愚答) - 윤경재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르 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는 경구는 示唆하는 바가 큽니다. 사람은 흔히 남을 판단할 때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현재와 미래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여간해서는 현재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기억이라는 특별한 장치 덕분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자신이 누구이며 또 타인에 대한 일관된 인식이 모두 기억에 의존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아무개라고 인식하는 자기의 정체성은 일관된 기억이 없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각 사람이 기억장치에 저장할 때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입력할 수 없으므로 무엇인가 중요한 순서를 정해 저장한다고 합니다. 그 기억의 중요도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과 결합할 때 증가한다고 합니다. 길을 걷다가 간판이나 풍경을 보기는 보았는데 도통 기억에 남지 않는 이유는 그 외부 자극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키지 않아서 그냥 망각 속으로 스쳐 지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번 감정과 결합하여 인식된 기억은 여간해서는 잊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원리를 이용하면 기억력을 증가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누구를 만나 이름을 외우든가 어떤 새로운 정보를 암기하려 할 때 무턱대고 외우지 말고 희노애락구오욕(喜怒哀樂懼惡慾)의 일곱 가지 감정을 이입해서 입력하면 오래 남는다고 합니다.

  친척과 고향 사람들은 늘 같이 부대끼며 생활하기에 어떤 감정이 자연스럽게 생겨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각인됩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은 여간해서는 수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정하려면 새로운 암기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데 오랜만에 만나면 그럴 여유도 없을뿐더러 사람들은 인지적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속성과 인지의 게으름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오셔서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니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자기를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음서 저자도 가르쳤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누가 가르치려 드는 꼴을 못 보는 성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비교당하는 것처럼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꿀리고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었다는 기억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더 어렵게 만듭니다.

  목수는 지금이나 그때나 존경받기 어려운 직업이었습니다. 쟁이라고 천시받았을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 요셉을 거명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마리아는 오래전에 과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남자들 평균 수명이 45세 정도였습니다. 과부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호칭에는 비아냥거림이 담겨 있습니다.

  6,2절에서 세 가지 질문을 제기 한 사람들은 6,3절에서는 스스로 답을 내립니다. 현문에 우답을 내린 셈입니다. 기껏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라고 감탄하더니, 그만 ‘인지의 게으름’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는 지혜를 지식으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사회적 틀 안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누구의 ~으로 격하시켜버렸습니다. 그런 폐쇄된 관점으로는 하느님을 발견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마치 광대한 우주를 깡통에 담으려는 시도나 똑같습니다. 언제나 스스로 답을 내리려는 데에 걸림돌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계를 맺자고 요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마음을 닫았습니다. 마음을 닫은 곳에서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건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거부한 고향이었고 친척들이었지만,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에 크게 변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형제로 거명된 야고보가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첫 주교가 됩니다. 그는 많은 유대인이 의인이라고 부를 만큼 뛰어난 인품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62년경에 대사제 아나니아스의 명령에 의해 돌에 맞아 죽는 순교를 당합니다. 그가 예수님의 충정을 보고 깨달아 변했듯이 많은 고향 사람과 친척들도 회개하고 입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 이후의 일까지 통찰하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현문에 우답을 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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