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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제1독서(창세44,18~21.23ㄴ~29; 45,1~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11 조회수1,408 추천수1 반대(0) 신고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제1독서(창세44,18~21.23ㄴ~29; 45,1~5)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 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창세45,5)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라고 번역된 '웨알 이하르 뻬에네켐'(weal yhar beenekem)에서 '웨알'(weal)'~마십시오'(do not)이고, '이하르'(yhar)는  '화내다'(be angry)이며, '뻬에네켐'(beenekem)부사구로서 '너희 스스로에게'(with yourselves)이다.

 

한마디로 '그러므로 당신은 스스로에게 화내지 마십시오'(And do not be angry with yourselves)이다.

 

요셉의 이 말 형 자신들이 팔았던 동생 요셉이 이집트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재상이 되었으니 죽을 죄를 지은 것이라고 스스로 비관하지 말라는 권면이다.

 

본문에서 사용된 부정어 '알'(al)은 '일시적인 금지'를 나타낸다.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일단 마음을 진정하고 자신의 설명을 들으라는 의미로서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라고 말하였고, 그 다음 문장의 '왜냐하면'이라는 뜻을 가진 접속사 '키'(ki; because)를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보내신 것입니다'에 해당하는 '셸라하니'(shellahani; sent me)기본형 '샬라흐'(shallah)'보내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다.

그런데 성경의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말씀,  즉 '구원', '도움'(시편20,3)이나 '재앙'에 관한 소식을(여호24,12) 전하기 위해 사자를 보낼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므로, 구세사안에서 약속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지고 있다.

 

구약 성경의 그리스 번역본인 70인역(LXX)'샬라흐'(shallah)'아포스텔로'(apostello)라고 번역했는데, 이 말이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보내신 '사도'를 의미하는 '아포스톨로스'(apostollos), '보냄을 받은 자', '파견된 자'어원이 되었다(마태10,2; 루카17,5; 로마1,1).

 

따라서 요셉이 '여러분 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라고 한 말의 의미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먼저 이집트로 '보냄을 받은 자'가 되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사실은 실제로 요셉을 이집트로 판 자들은 형들이었으나 본문의 주어가 '하느님'(엘로힘)으로 나오는 데서도 확인된다.

요셉의 형제들이 시기심 때문에 요셉을 미디안 사람들에게 팔았던 사건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될 야곱 일가의 생명을 보존시키기 위해 먼저 요셉을 이집트에서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사용하셨음을 보여 주고 있다.

 

결국 요셉의 이야기는 한 인간의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가 승리한 사실을 전해주는 의미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선택하신 백성을 보존하고 계약을 계승시키려는 창조주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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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독서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막내 아우 벤냐민을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데려오면 살려줄 거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을 들었을때, 형들은 자신들에게 가중되는 고통의 압박감 때문에, 지난 과거를 뉘우치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창세기 42장 23절에 형들이 요셉과 자신들 사이에 통역이 서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못 알아듣는 줄 알았으나~ "요셉은 그들앞에서 물러나와 울었다"고 되어 있다.

 

요셉이 위선자인가? 겉으로는 형들을 엄하고 무섭게 대하고, 돌아서서 우는 이중인격자인가?

이것은 아이들을 혼낸 후에, 돌아서서 괴로워 우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다.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것이다. 깊은 참회를 경험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창세기 43장 27-30절을 보면,

요셉은 형들이 아버지 야곱을 설득해서 동생 벤야민을 데리고 와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때,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묻고는 눈을 들어, 자기 친 어머니 라헬의 아들 친동생 벤냐민을 보며,

자기 아우에 대한 애정이 솟구쳐 올라 울음을 참았다가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운다.

 

이렇게 요셉은 다시 해후하게 된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 때문에 하염없이 마음속 깊은 곳, 뼈속 깊은 곳에서 울음이 솟아나는 순수한 피와 감성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공인인 재상으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마음으로는 이미 용서해 주었지만~

형들의 참회를 이끌어내고 진정한 화해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공적으로 울음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절제의 미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 창세기 44장 18-34절을 보면,

유다가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수가 없어 벤야민 대신에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나서는 목숨건 간절한 애원에,  더 이상 요셉은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신하들은 다 물러가게 하고, 형제들 앞에서 목놓아 운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이집트 사람들에게 들리고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렸다.

 

대성통곡의 의미가 무엇인가?

 

단순히 형들에게 왕따 당하고 자신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형들의 배신에 대한 상처와 한풀이인가?

그동안 오랜 세월동안,아버지와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고아처럼 살면서 갖은 고생을 하다가~ 기근이 동기가 되어 극적 조우를 하게 된 애증의 눈물인가?

 

형들이 요셉 자신에게 한 과거 행위들을, 바닷가 모래톱위에 새겨진 글자처럼 비바람과 파도에 씻어버리고 망각의 피안으로 날려버린, 형들의 실종된 죄의식과 무뎌진 양심을 회복하고, 뉘우치게 하는 과정속에서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인간성의 선함을 발견하고 화해하게 하는, 느님의 섭리와 안배하심에 대한 감사의 눈물인가? 

 

어쨌든 요셉은 형들을 가까이 오라 하고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팔아 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이 땅에 기근이 든지 이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거두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땅에 일으켜 세우고, 구원받은 이들의 큰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서둘러 아버지를 모시고 이곳으로 내려오십시오."(창세45,4-14참조)

 

위의 요셉의 말속에서 형들에게 형님들이라는 존칭을 쓰고, 자신을 아우라 하며, 우리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정안에서의 위계질서와 한식구라는 동질성과 관계를 바로잡고 회복을 한다.

또한 분명히 형님들이 자신을 이집트로 팔아 넘긴 것을 지적하나, 이제 충분히 자신의 행위를 알아듣고 참회했으니, 죄책감과 자책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한다. 

 

그 다음 이제는 마음과 시선을 들어 올려 모든 일들 위에 초월하여 있는, 하느님의 크나큰 섭리와 안배를 바라보면서 그들과 온전히 화해를 이루고 수평적인 관계 회복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용서와 화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만났을때 마음으로 이미 용서했다. 용서는 상대방과 관계없이 내가 하느님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면 된다.

그러나 화해는 다르다. 요셉이 형들을 감옥에 가두고, 막내동생을 데려 오라 하고,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묻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시 불러 들이는 과정이 바로 자신과 형들의 잘잘못을 따지며 화해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질때, 인간들의 상호 주고 받은 상처와 고통 너머로~~

아니 그것안에서도 선을 끌어내시며 당신의 일을 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가 보이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 요셉을 이집트의 재상으로 만드신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형들을 보호하고 도와주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사실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자격없고, 부도덕하고, 혈기많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단련하시고, 믿음의 열두 지파를 세워서, 하느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요셉은 자기 아우 벤야민의 목을 껴안고 울었다. 벤야민도 그의 목을 껴안고 울었다. 요셉은 형들과도 하나 하나 입을 맞추고 그들을 붙잡고 울었다. 그제야 형들은 그와 이야기 했다."(창세 44,14-15)

 

눈물은 이렇게 상처를 닦아 주는 치유를 가져오고 화해를 가져온다.

형제들간의 이 울음은, 창세기 46장 29절의 요셉이 고센으로 올라가 아버지 야곱을 만나 ~ 목을 껴안은채 한참 우는 장면으로 절정에 달하고 목적을 이룬다.

이처럼 요셉의 영적 통찰력은 인간적인 육정을 초월해서 하느님의 일과 구원의 대 드라마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10,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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