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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루가 10장25 - 37절)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13 조회수1,975 추천수1 반대(0) 신고

 

강도를 당한 유대인을 구하는 사마리아인을 표현한 그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 사랑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영생의 본질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루가 10:25~29)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묻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능통한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서는 뭐라 하더냐?’ 하시며 다시 되물으십니다. 그랬더니 율법사가 훌륭하게도 신명기 6장의 쉐마로 율법을 잘 요약하여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아주 잘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네 대답이 옳으니 이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거기까지만 보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몫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잘하면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잘 보셔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커다란 반전이 있습니다.

 

그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즉 자신은 충분히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누가 이웃인지 말만해주면 다 사랑해 버리고 말겠다는 기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이웃을 스스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절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절대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웃은 자기들과 같은 민족 혹은 자기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믿고 자기 민족으로 편입이 된 사람들에 한해 이웃을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민족과 종교가 같고 한 가지 뜻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그런 사람들만을 이웃으로 규정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웠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사는 자신 있게 누가 내 이웃입니까? 말만 하세요. 제가 가서 죽도록 사랑해 버리겠습니다.’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영생의 본질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루가 10:30~37)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어떤 이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을 만치 맞았습니다. ‘초죽음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헤미다데스거의 죽다 완전히 기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강도 만난 사람은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상태로 완전히 자아방어 능력을 상실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은 당시에 아주 유명한 강도 출몰 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성전이 있는 곳이었고 예리코는 제사장들과 레위인 들이 약 만 이천 명 정도가 살고 있는 성전 섬김이 들의 집단 거주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노린 강도들이 수시로 출몰을 하여 제사장들이나 레위인 들이 마차나 말 등에서 절대 내리는 일이 없었고 도보로 다니는 사람들도 무리를 지어서 다니거나 길에서 멈춰서는 일없이 바삐 오가던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강도들의 미끼가 길에 던져져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길에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지켜지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강도들의 일행이 강도를 만나 신음을 하고 있는 여자나 노약자로 가장해서 길에 누워있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길을 가던 사람들이 길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서도 그냥 바삐 지나가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강도만난 사람이 거의 죽어서 누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 를 묻는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냐?’ 라고 되물으시지요?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그 율법사를 누구에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까? 강도만난 자에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고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고 하는 율법사에게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네가 바로 은혜와 자비를 입어야 할 강도만난 자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본주의에 빠져 율법지킴을 구원의 방법으로 알고 있는 이들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바오로의 표현을 빌리면 그 상태가 바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강도만난 자로 비유되고 있는 율법사는 무엇을 강탈당한 상태라는 것입니까? 강도만나 거반 죽어있는 자가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라면 그 강도만난 자는 무엇을 빼앗긴 상태입니까? 하느님을 잃은 상태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잃은 자들을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라고 하니까요. 하느님만을 의지하여 하느님의 은혜로만 살아야 하는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뱀(마귀)이라는 강도의 속임수에 속아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죽어있는 상태가 바로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느님을 강탈당한 채 죽어 있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이 뻗칩니다. 구약의 율법과 제사를 상징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강도 만나 초죽음이된 자를 보도고 그냥 지나갑니다. 손도 못 댑니다. 그건 율법과 제사로는 하느님을 잃고 초죽음이 되어있는 상태인 강도 만난 자를 절대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쳤다고 해서 그들의 매정함을 나무라는 데에만 집중하면 안 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성전으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 아니면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되는 성전의 섬김이들 이었고 율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나 마차에서 내리거나 멈추어서 얼쩡거릴 수 없는 그런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강도만난 사람은 강도들의 미끼일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을 반응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은 자비의 마음보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다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매정하고 매몰찬 자들로 몰아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율법과 제사 즉 행위는 절대 강도 만난 자를 도울 수 없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웃 사랑은 사람의 행위에서 생산되어 나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사마리아인이 다가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길은 유대 땅입니다. 유대 땅에서의 사마리아인은 개 취급도 못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 유대사람들의 원수였습니다. 오죽하면 유대인들은 너무나 장사가 안 돼서 굶어 죽기 일보 직전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위험한 땅에 율법주의의 이방인이자 유대주의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곳은 율법의 땅의 상징인 예루살렘과 예리코를 잇는 유대 땅입니다.

그곳은 성전과 그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거주지를 잇는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강도들의 땅이며 원수들의 땅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그곳에서 그 누구에게 붙들려도 죽음을 당하게 되는 그런 곳입니다. 그 율법의 땅 강도들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이방인 율법의 화신인 유대인들의 원수가 사마리아인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서는 거반 죽어가는 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형식적인 율법과 제사의 땅에 진짜 선한 이방인이 원수들의 땅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원수를 살려냅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원수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생이며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인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이웃인 예수에 의해 사랑을 받고 섬김을 받아 주어지는 것이라는 구원과 영생의 본질을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의 땅 죄인들의 땅 율법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십자가의 삶 은혜의 삶을 가지고 원수인 강도 만난 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이 세상의 이방인인 선한 예수가 바로 그 사마리아인으로 비유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느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면목 없는 강도만난자의 모습으로 영생으로 가야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을 인본주의라는 뱀의 아가리 속에서 살아온 죄인들은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영생에 자기도 뭔가를 기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오직 은혜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처럼 낯설고 미운 것입니다. 아니 원수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강도를 만나 예루살렘 길에 쓰러져 있던 그 사람이 조금의 힘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았을까요?

절대 안 받습니다. 왜 치사하게 남의 도움을 그것도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습니까? 그게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나선 타락한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게 되었지요? 거의 반 죽었거든요. 거의 죽어서 사마리아인이 이리 굴리면 이리 구르고 저리 굴리면 저리 구르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거부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있는 성도들이 바로 그 자리로 해체되어 가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때까지 하느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헤미다네스거의 반 죽여 버리십니다. 그게 자기부인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그렇게 거반 죽어 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의지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과 그 분이 보내신 예수만을 의지하여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내 뜻 내 꿈 내 비전 내 야망 내 의견 내 주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계속 우리를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헤미다네스거의 반 죽이고(초죽음) 계신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만 붙들라고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십자가라는 하늘의 삶의 원리를 들고 이 땅에 오신 세상의 이방인이신 예수를 붙들라고 우리를 거의반 죽이시는 것입니다. 왜 죽은 자들이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 마치 산자들처럼 기고만장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세상에 대해 살아있고 하느님에 대해 죽은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진짜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느님에 대해 산 자들은,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은 하느님 앞에서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티끌처럼 겸손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펄떡 펄떡 뛰는 당신의 백성을 초죽음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거부하시면 안돼요.

우리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져 주라고, 당해 주라고, 섬겨 주라고 ,십자가를 지라고, 용서해 주라고 요구하시면서 우리를 치유하고 계시는 그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이 이방인이 왜 이렇게 낯선 이방나라 말만 하고 있는 거야?’ 하며 계속 거부하다보면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철장으로 거반 죽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시키시는 예수님의 치료를 순순히 받게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반복하여 외치는 것입니다.‘자기를 부인하라 십자가를 져지라조금이라도 살아있으면 안 됩니다. 그건 영생 얻은 자의 삶이 아닙니다.

 

(마태 18:8-9) 8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자나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9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을 의지하고 있다하더라도 다 잘라내시겠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게 팔 다리라도 잘라내신다고 하시는데 하물며 돈 명예 자존심 자식 건강 이런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것을 힘 삼아 펄떡 펄떡 뛰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하느님께서 그냥 놔두시겠어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거반 죽이십니다. 반드시 자기 부인을 시키십니다.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느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어절의 진의가 무엇인지 이제 잘 아시겠지요? 어서어서 여러분의 티끌 됨을 인정하시고 하느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공로만을 꼭 붙드세요. 그게 이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는 자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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