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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 바오로 (성거산지기신부님 연중 제3주일강론)
작성자김시원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30 조회수528 추천수3 반대(0) 신고

 

Photo by 성거산지기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 
  
제주도의 꽃
 
 

사도 바오로

 

2009년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주일).


사도 바오로의 개종 축일


성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라는 수식어가 말해 주듯 복음 선교의 모범, 모델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교황은 그를 가리켜 '완벽한 선교사'라고 정의했습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는 27권의 신약성경 중에 약 13(4)권이나 되는 책을 집필한 저자이기도 하지요.

그 성경은 테살로니카 전.후서, 코린토 전.후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필립비서, 필레몬서, 콜로새서, 에페소서, 티모테오 전.후서, 티토서, 히브리서입니다.

그 중에서도 초대 교회를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한 분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름은 그래서 두 개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교 신자였던 때 ‘사울’로 불렸고 회심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들어와서는 '바오로'로 불리었지요.


사도 바오로가 집필한 신약 서간문 13권에는 바다보다 넓고 깊은 그의 사상뿐만 아니라 인간적 고뇌와 열정까지 그대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생애는 매우 극적이면서 또 한번 마음을 정하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 가장 충실하고 충직한 모습의 생애였습니다.

바오로의 생애를 어떻게 나누고 가르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바오로의 생애를 네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① 태어나서 28세- 유다인 실천가

② 28세부터 41세까지- 회개의 열정가

③ 41세부터 53세까지- 떠돌이 선교사

④ 53세부터 62세에 죽기까지- 공동체 조직가로 바오로 생애의 여러 모습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실천하는 유다인의 귀감


바오로는 언제나 종교심이 깊은 사람, 실천하는 유다인,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 조상들의 전통을 정성을 다해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전통을 지키려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바오로는 조국의 종교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바오로 시대에는 율법 준수를 강조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의 의식과 삶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이상적인 율법준수가 점차 악습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모든 율법을 지키면 나는 하느님께 그 대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식이었습니다.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그 만큼 그에 따른 상급이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율법을 더욱 엄격히 지키게 하기 위해 하시딤 운동, 바리사이 운동, 에세네파 운동, 열혈당원 운동 등 다양한 운동이 펼쳐지게 됩니다. 바오로는 그 가운데 바리사이 집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생애 처음 28년 동안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낼 수 있다는 신념에 사로 잡혀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하느님께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왔습니다.

자기 안에 커다란 모순을 느끼고 됩니다. 이것은 바오로 자신이 깨지는 크나큰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

아무리 애를 써도 하느님의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었고 의로운 상태에 도달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교회의 박해


회심 이전에 바오로는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기에 그는 율법을 비판한 예수를 용납 할 수 없었고, 율법과 성전 체제에 도전하다가 처형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닌 '저주 받은 자' 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은 더욱 납득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다혈질적인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가 박해한 그리스도인들은 토박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고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자인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가담하였고, 시리아 지방의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그 곳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바오로의 회심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200킬로미터 떨어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을 수 있는 허락을 산헤드린한테 받았습니다.


33년경 바오로의 28살 되는 나이에 산헤드린의 이름으로 다마스커스 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할 일행을 이끌게 됩니다. 그곳까지 가려면 1주일이 걸립니다. 그런데 도중에 갑자기 강렬한 빛이 비쳤습니다.

바오로는 땅에 넘어졌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박해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예수께서 " 왜 ,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당신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며 박해받는 사람들 편을 듦으로써 박해하는 자와 맞서십니다. 바오로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넘어진 사건은 그의 생애에서 전환, (Turnning point) 또는 분수령이 됩니다. 그 순간부터 바오로의 생애는 '이전'과   '이후'로 갈라지게 됩니다.


넘어짐: 예레미아처럼 바오로도 "주님,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하느님은 인간의 허락을 구하지 않으시고 무작정 쳐들어와 바오로를 넘어뜨리셨습니다. 남의 꾐에 넘어갔고,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하고 말합니다.


눈멂: 빛이 바오로를 감싼다(사도 9장3절), 에제키엘처럼 바오로는 주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을 보고 땅에 넘어집니다. 그 빛이 너무 강렬하여 눈이 멀고 3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합니다. 어둠과 죽음에 갇힌 3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할 하실 때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3일 동안에 역할이 바뀝니다. 지도자가 오히려 지도받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니아스가 손을 얹고 ������사울 형제������ 라고 부르자 바오로는 시력을 되찾습니다, 공동체가 그를 형제로 받아들인 바로 그 순간 부활한 것입니다. 박해자 바오로가 죽고 예언자 바오로가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사로잡힘 : 누군가에게 사로잡히거나 붙들린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하느님이 바오로 뒤에서 올가미를 던져 낚아채어 넘어지게 하신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와 같이 넘어짐, 눈이 멂, 사로잡힘 또는 올가미라는 말은 우리에게 그 의미를 던져줍니다. 바오로가 그동안 살아왔던 세계와 갑작스런 단절을 이루고, 그때까지 그가 세워놓았던 체제가 실패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오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느님께서 전부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장5절)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립 4장 13절)


사도 바오로는 모든 것이 단절이 되었고 깨어지는 체험을 합니다. 바오로는 그 때까지 영양을 공급받던 이상, 곡 완벽한 율법준수, 의롭게 되어 하느님께 이르는 노력, 어려서부터 배우고 실천해 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됩니다. 그동안 살아온 세계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단절의 극적인 순간에 하느님의 얼굴이 다시 보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 (사도 9장4절)


바오로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갑자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순전히 은총으로(공짜로), 그때가지 28년 동안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도달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 곧 하느님이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뽑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고 만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바오로가 무엄하게 하느님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있을 때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보여주셨고, 은총이 죄보다 훨씬 컸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어지심에 대한 그 같은 체험은 강력한 빛이 되어 바오로의 눈을 멀게 합니다.

바오로는 드디어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율법으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행하시는 일에만 의지하게 됩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바오로는 그러한 하느님 사랑의 무상성을 체험했습니다. 이 체험은 하느님과 관계 맺는 방식을 새롭게 해주었습니다.


바오로는 이 체험을 깊이 간직했으며, 그 체험은 바오로 자신의 영성에 물을 대주는 새로운 샘이 되었습니다. 그 샘에서 바오로는 강력한 힘이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잊고, 자기 힘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 오직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섬기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몸을 내주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기쁜 소식은 바오로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입에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장 20절)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바오로는 이러한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자기 아집에서 벗어나 이제는 내 생각과 뜻을 따르지 않고 나에게 명령을 내리시는 주님의 생각과 뜻을 따르겠다고 예수님께 고백을 합니다. 이제 바오로는 주님이 명령하시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됩니다.

전에는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공인 줄 알았지만, 이제는 그와 정반대 체험을 합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분" 이 자기 안에 계시면서 24시간 내내 명령을 내리고 계심을 체험합니다.

자유인이요 로마 시민인 바오로는 이제 그리스도의 진실한 '종' 이 됩니다.

바오로는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속해 있지 않게 됩니다.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로마 14,8절)

그러나 스스로를 포기한다고 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주셨습니다."(갈라 5장 1절: 2장4절)


다른 사람의 종이 된 자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러한 체험은 바오로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 체험으로 바오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자기 포기에 의미를 주며 다른 모든 것을 하찮게 여깁니다. 바오로는 이미 미래를 살고 있게 됩니다. 이미 죽어 부활해 있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부족함이 없이 사는 것과 궁핍하게 사는 것, 소유하는 것과 소유하지 않는 것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품은 가장 큰 열망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입니다.


묵상: 우리는 덤으로 사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느껴 본 적이, 체험한 적이 있는가?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겪은 체험은 그의 마음속에 샘물이 솟아 흐르게 했습니다.

바오로의 그 체험 즉 바오로의 삶 가운데 현존하게 계신 하느님과 부활하신 예수께 대한 체험은 바오로의 삶에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으로 바오로의 삶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무엇보다도 전통과 율법만을 강조하던 바오로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 주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해주었습니다. 마치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 안에서 전에는 보지 못한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겪은 체험은 바오로 인생을 비추고 어려운 순간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바오로처럼 우리도 자신의 인생사가 있습니다. 그 인생사 안에는 우리 인생을 비추어 주는 사건과 체험이 현존합니다. 우리도 그러한 체험을 어느 것 하나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각 체험은 우리가 어려운 순간을 지날 대마다 위기를 극복하는 힘을 줍니다.


우리는 오늘 바오로의 회심을 통하여 새로운 인생길을 걸어가는 바오로가 겪은 체험에 합당한 가치를 주고 우리 안에 있는 샘을 다시 찾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처럼 우리 각 사람이 겪는 체험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와 모든 사람아 나아가는데 소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 개종 축일을 보내면서, 어떠한 여건에 있더라도 나를 지켜봐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으면 합니다. 그 사랑에 매력을 느끼고 감동한다면,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하느님의 힘으로 큰일을, 주님의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는 사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앞에 겸손한 사람, 하느님의 힘을 믿고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봉헌된 자의 비움(무)을 통하여 당신의 놀라운 기적(유)을 창조해나가십니다.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하며 우리도 주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 눈을 덮고 있는 비늘을 제거하여 달라고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합시다.

성거산지기 신부님 연중 제3주일 강론

http://cafe.daum.net/sgm2008  성거산 성지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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