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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 명 (성거산지기신부님 연중2주 강론)
작성자김시원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30 조회수432 추천수1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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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성거산지기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 
 
 
성거산의 일출
 
 
소  명(성거산지기신부님 연중 제2주일 강론)


연중 제2주간 일요일 (요한 복음 1장 35-42절 )


오늘 복음의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최초의 효과를 거두는 장면입니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세례자를 떠나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다른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최초의 사도가 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교회 초기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두 제자와 함께 군중과 좀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두 제자 중 하나는 안드레아이고 다른 제자는 요한 복음서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예수님께 사랑받던 제자 복음사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서 계신 예수님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고 예수께서는 멀리서 요한의 시선을 받고 계셨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때 그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단순한 세례자 요한의 말 한마디가 두 제자의 의지력(意志力)을 움직이게 하였습니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혹은 예수라는 인물이 풍기는 매력이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은총의 숨은 자극이었을까? 아마도 이런 것들이 함께 작용했을 것입니다.


두 제자는 스승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 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바라는 소망을 부추기듯 인자하게 두 사람에게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왜 나를 따라 오는가? 내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두 사람은 막연하게 "스승님,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터놓고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소청을 잘 아셨기에 곧 그 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두 제자는 그날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많은 것을 배우고 천상적인 행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시몬 동생 안드레아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다고 희소식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예수께 데려 오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시몬을 데리고 예수께 데리고 오자 예수께서는 시몬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준다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며, 이름을 바꾸게 된 사람은 직업이나 사명을 바꾼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몬에게 지어 준 이름은 게파, 그리스 말로 바위라는 뜻인데 이 상징의 뜻은 시몬 베드로가 교회의 토대가 되리라는 의미를 명시한 것입니다.


요한 복음 1장에서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소명의 발전과정을 묘사합니다.


처음에는 누군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지적합니다(요한 세례자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 다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질문이 던져집니다(“무엇을 찾느냐?” 이 질문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첫 말씀입니다).

그 다음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합니다(“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그 다음 투신에 대한 서약을 요구받습니다(“와서 보아라”).

그 다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소명과 관계를 수용합니다(“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끝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그 기쁨을 나누는 데 이릅니다(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하고 응답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계속 물으십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제자들의 대답은 주님과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관계를 바라는 우리의 열망을 대변합니다. 이런 열망이 있어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도 체험하는 기회도 주어 질 것입니다.


오늘 사무엘의 부르심에 대한 제1독서와 복음은 공통된 주제는 부르심에 관한 말씀입니다.

과연 부르심은 무엇인가?

부르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르심이란 단어는 간단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왠지 두려워지는 단어입니다.

누구에게 소명을 가르칠 때 정말 두렵고 떨림으로다가 온 적이 있는가? 왜 그런가?

생명을 걸 수 있는 문제이므로, 내가 확신 했다고 그에게 주입 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들은 소명이 있다면 진지하게 그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의 목적인데, 하느님의 소명인데 어찌 경외심 없이 함부로 말 할 수 있을까?

소명이란 하느님이 나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나의 존재 전체, 행위 전체, 소유전체를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데 투자된다는 진리입니다.

이소명이야 말로 인간 경험 중 가장 큰 방향전환이요 위대한 동기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궁극적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추구자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추구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해답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부르심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나의 열등감, 모험심, 주위사람, 가족, 인도자 과연 누구인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확신했는가? 한번쯤은 부르심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진실의 창을 열어 스스로에게 물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면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카테고리 속에서나, 기질과 성격 속에서, 우리 마음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개별적인 음성을 듣고 성령께서 나에게 뭐라고 하시는지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과 목적 등 여러 가지 말을 하기 이전에 먼저 그에게 들리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소명은 우리 각자의 욕망을 합리화 시켜주는 말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헌신 없는 소명은 자기 자랑에 불과 한 것입니다.


첫째 우리의 소명은 "타인을 위한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개별적인 소명과 공동체적인 소명을 구별해야 합니다. 개별적인 소명이 독특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적 소명이란 우리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하느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적인 소명이 중요한 이유는 소명이 지나친 개인주의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인 소명은 공동체적인 소명을 보완해야 하지 그 것과 모순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공동체적 소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개별적인 소명을 앞세워 교회의 공동체적 소명을 거부하는 자는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둘째 우리의 소명에서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직자, 수도자는 여러 가지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핵심적인 일은 자기 재능과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가 핵심적인 재능에만 집중 할 경우 잘못 길들여지기 쉽습니다.


바오로는 천막 만드는 일이 소명의 핵심이 아니었고 삶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소명의 일부분일 뿐이었습니다.


소명의 핵심은 우리의 가장 깊은 재능을 활용함으로써 우리의 자아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현대의 도전에 가장 효과적으로 응전 할 수 있는 길은 소명의 진리를 이 사회에서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른바 삶에 뿌리내린 영성으로 나아갈 때 개개인은 사회에 큰 영향을 발휘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소명을 주신 분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은

소명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순종은 소명의 사실 여부를 평가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이름을 내고 영웅이 되고 싶어 합니다. 고매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의 소명을 쫓는 삶 자체가 고상하고 특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소명이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도달 한 자가 아니라 이 생애 동안 항상 그리스도의 추종자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소명을 가진 자는 항상 인생의 여정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임으로 이제 인생이 끝났다고 승리했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는 것은 잘못 된 생각입니다.

세속화는 현대 세계에서 온전하고 살아있는 믿음에 대항하는 도전입니다. 소명은 이러한 세속화에 정면으로 대항합니다. 이러한 다원화를 강조하는 현대 세계는 하느님 없이도 잘 굴러 갑니다. 심지어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지중에 사실은 무신론자인 이유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하느님의 소명을 붙잡고 그분의 약속을 의지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소명을 쫓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는 뻗어 나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


어리석음과 영웅적인 것은 항상 대조적입니다. 진정한 바보는 하느님이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고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보처럼 비치는 자는 다릅니다.

그들은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보로 비치고 또 그렇게 대우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음을 짊어져야 하는 것 이런 사람은 거룩한 바보입니다.

거룩한 어리석음은 제자들의 부르심에 중심적인 것입니다.


역사를 통틀어 예수 그리스도께 신실했던 위대한 인물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아씨시 프란치스코, 그 가운데 한명입니다. 바보처럼 되는 것이 소명에 필수적인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과 동일시되는데 따르는 대가를 지불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아를 부정하고 그분을 좇아 십자가를 지며 그분의 소명에 순종하는 값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좇는 사람은 듣고, 행동하고, 결단하는 모든 과정을 주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나에게 소명을 주신 분이 누구인가를 항상 생각합시다.

부르신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부르신 만큼만 응답하도록 결심합시다.

응답할 수 있고, 쫒을 수 있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소명을 발견하도록

주님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입시다.

 

성거산지기 신부님 연중 제2주일 강론

http://cafe.daum.net/sgm2008  성거산 성지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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