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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땅이 저절로 열매를'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30 조회수654 추천수2 반대(0) 신고
<땅이 저절로 열매를>(마르 4,26-34)

 -유 광수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속이 찬 낟알이 맺힌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오늘은 하느님 나라의 세 번째 네 번째 속성에 관한 설명이다. 첫 번째는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뿌린 씨와 같기 때문에 이 씨를 잘 가꾸어야 하고, 두 번째, 하느님의 나라는 등경 위에 놓은 등불과 같다. 그래서 등불인 하느님의 말씀에서 빛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오늘 셋째, 하느님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과 넷째, 겨자씨에 대한 비유로 설명하신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서 자라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신 말씀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의 신앙이 또는 나의 영적인 성장이 잘 되려면 그 비결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신앙은 나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다른 하나는 나의 노력이다. 하느님의 은총 없이 나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항상 내 안에서 무엇을 시작하시고 그것을 완성시키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나는 다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잘 따르기만 하면 된다. 즉 하느님께 순명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하느님의 역할과 나의 역할의 차이점이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은 매우 능동적이시고 나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수동적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즉 하느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며 나는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도 중요하지만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세 또한 중요하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내가 그 은혜를 받아 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없다. 따라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세도 중요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자세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내가 앞장서서 무엇을 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하나도 빠뜨리지 아니하고 모두 받아들이려는 노력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인 "저절로 자라는 씨앗과 겨자씨에 대한 비유"는 하느님의 능력 즉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설명이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서 강조하는 것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나와 아무 관련 없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뿌려진 씨가 자라는 것은 씨를 뿌린 어떤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속이 찬 낟알이 맺힌다." 싹이 터서 낟알이 맺히기까지 질서 정연하게 순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이"저절로" 이루워 지고 있다는 것이다. 천지 창조 때에도 하느님은 항상 질서있게 하나 하나 창조하셨고 그 질서를 유지하셨다. 혼돈에서 질서를 잡아주셨고 그것들이 각자의 개성대로  잘 자라도록 축복해 주셨다.

 

어떤 사람은 다만 "곡식이 익으면 곧 낫을 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아기들이 자고 일어나면 키가 자란다. 어떻게 자라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냥 자고 일어나면 저절로 키가 크고 자란다.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들의 머리도 그렇다. 언제 어떻게 머리카락이 자라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 달이 되면 또 이발을 해야 하고 미장원에 가야 한다. 참으로 신간한 일이다. 이렇듯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넷째, 하느님 나라의 속성은 "겨자씨와 같다"는 것이다. 겨자씨란 가장 작은 것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최초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오신 분이시다. 아니 이 세상에 세워진 하느님의 나라이시다.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시키셨는가?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하느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부는 특히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새로운 삶의 방법을 배우고 그렇게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예수님에게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는 조금씩 확장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시작된 이 하느님의 나라는 열두 제자들만이 아니라 열 두 제자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파되기 시작했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예수님이 최초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오신 겨자씨와 같이 작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당신의 뒤를 이어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고 가르치는 일을 하기 위해 파견된 열두 제자들의 존재도 겨자씨와 같이 작고 나약한 공동체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이 작은 공동체가 어떻게 크게 자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열두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겨자씨가 자라는 것을 매순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겨자씨는 자라고 있다. 우리의 영성생활이 얼마나 자라는지 금방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내 안에 뿌려진 겨자씨와 같은 말씀을 정성껏 가꾸며 살아갈 때 나도 모르게 영성적으로 성숙되어 간다. 그 속도는 내가 정성들여 가꾼 만큼 자랄 것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꽃밭을 갈고 씨앗을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 주고 벌레를 잡아 주어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심고 가꾸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이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둔다. 우리는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거나 심지 않았는데 수확만을 기대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요즈음 우리 국민의 사고방식과 인생관, 가치관은 저마다 인생을 쉽게 살려고 한다. 노력없이 성공할려고 한다. 노력의 땀을 흘리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허망한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벼락 성공, 벼락 출세, 벼락부자, 벼락감투는 벼락맞을 생각이다.인생은 결코 쉽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쉽게 살아지는 인생은 행복할 수도 없고 또 행복하다고 해도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톨스토이는 "손에 굳은살이 박힌 사람이 식탁의 제일 상좌에 앉아서 따뜻한 밥을 먼저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꾸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없다.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 신앙생활, 땀흘려 가꾸며 성장시키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쉽게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자세는 버려야 한다.
 
 이제 이 겨자씨는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겨자씨가 되어야 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는 작은 겨자씨로 존재해야 한다. 작은 겨자씨이지만 썩어서 바로 그곳에서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와서 깃들일 수 있도록 크게 자라나야 한다. 우리가 자라지 않으면 그 누구에게도 우리 주위에 모여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해 줄 수 없다.
 
우리가 자란다는 것은 우리의 신체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성숙을 말한다.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우리의 영적 세계를 성숙시켜 줄 말씀이 우리 안에 뿌려져서 자라야 한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이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씀을 잘 가꾸면 점점 우리 안에서 우리를 성장시켜 줄 것이다. 우리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이루워지기를 바라는 조급함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모여 쉴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로 자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말씀이 내 안에 뿌려져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을 수 있을 만큼 자라려면 하루 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어느 한 말씀이라도 내 안에 뿌려져서 자라도록 정성껏 가꾸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성인들이 복음 전체를 실천하며 사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한 말씀을 온몸으로 사신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예수님"을 사셨다. 마더 데레사는 "보잘것 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의 씨앗을 정성껏 가꾸며 키웠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라는 겨자씨와 같은 작은 말씀으로 시작된 꽃동네는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그늘에 와서 깃들이고 있는가?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말씀은 늘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하느님의 나라가 "크고 웅장한 나무와 같다."고 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레 겁부터 먹을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작은 것 중에서도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설날이 다가왔습니다. 제대로 성숙하지도 못했는데도 하느님은 성숙해졌다고 또 나이 한 살을 더 얹어 주십니다. 그만큼 어른이 되었음을 인정해 주시는 것이겠지요. 우리 모두 한 살 먹은 만큼 성숙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합시다.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은혜로 영적으로 성장하고 또 하시는 모든 일들이 번영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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