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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83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6 조회수419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연중 제4주간 금요일]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4-29

그때에 14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7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 요한의 죽음에 관한 내용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비교적 긴 복음에 속하지만 요약하면 세례 요한이 죽은 이유는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 직언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이런 직언이 절실히 필요함을 알려주는 복음입니다.

우리 역사에도 충언과 직언을 한 충신들은 무수히 많지만 황희 정승과 태종의 관계를 떠올려 봅니다.

조선 3대 태종은 새 왕조의 기틀을 잡으려면 세자인 영녕대군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세종이 된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해서 가장 신뢰하였던 황희에게 상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황희는 양녕대군이 몇 가지 말썽을 피운 것은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이며 큰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라며 양녕대군을 옹호하며 "세자를 폐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고 직언을 하였습니다.

태종의 뜻을 거역하였으므로 황희는 남원으로 귀향을 갔지만 왕위를 양위한 태종은 자신의 사후에도 세종을 보필할 신하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세종 4년에 남원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황희를 다시 발탁하도록 천거하였습니다. 이로부터 1년 후, 태종은 세상을 떠났지만 세종과 황희는 이후 20년이 넘도록 국사를 보살피며 조선왕조의 최고 전성기를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사회는 이런 충정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의 생명이 위험하므로 위험물을 방치한 체 철거민을 진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경찰의 공권력으로 건설회사의 용역 일을 해서는 옳지 않습니다."
"참사가 일어났으면 책임자는 지휘, 관리책임을 져야합니다.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진 자의 배를 불리고 도시빈민을 내쫒는 뉴타운개발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국가 중요 안보시설인 공군활주로를 민간기업의 이익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변경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민간연구소의 경제전망치 연구결과가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공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연구기관의 연구보고서가 정부입장과 다르다고 압력을 행사하고 책임자를 내쫒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검찰의 수사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므로 면죄부를 주기위하여 사건을 축소, 은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흠결이 있는 인사를 중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 사회는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하는 직언을 해야 할 일이 헤아릴 수 없도록 많은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직언이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반성하라는 복음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할까요? 모두가 자기 목숨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 두 분 모두 "옳지 않습니다." 하여 돌아가셨음을 그 누구보다 우리 그리스도 교인들은 잘 알고 있기에 우리와 우리 교회는 침묵하는 것 같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이사야예언자의 말씀인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를 인용하며 세례 요한의 얘기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길을 닦아 놓는다는 것은 뒷사람의 등불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등불이 되었고, 예수님은 우리의 등불이 되시고자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닦아놓은 길을 예수님은 죽음의 길마저도 뒤 따라 가신 것입니다. 진정한 聖人은 이처럼 불의에 항거하며 세례 요한을, 예수님을 뒤 따라 가신 분들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처럼 불의에 항거하는 성직자들은 교회 내에서 지금 불이익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따로 있고 사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교회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두 분 모두 이 사회의 등불이 되고자 하였기에, 이 사회에 직언을 하였기에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밖에 없는 내 몸까지 내 놓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자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흉내라도 내 보자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자비의 실천입니다.

교회는 위정자들로 부터 탄압을 받아야 정상적인 교회입니다. 이 땅이 하느님의 나라가 될 때까지 탄압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지도자들은 위정자들로 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는 직언의 필요성이 봇물을 이루고 있음에도 교회지도자들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의 법을 지키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의 법을 실천하고 지키기 위해서, 또 이를 알리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깨닫는 복음이 되기를 소망하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세례자 요한은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직언하여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닦아 놓은 그 길을 따라 가시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저희들도 그 길을 따라가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이를 저희 교회와 저희가 잊지 않도록 언제나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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