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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心中에, 십자가를, 놓으십시요[감곡 성당 김웅열 토마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6 조회수714 추천수2 반대(0) 신고

                                       

 

 

               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매괴 성모님 순례지 photo by 느티나무 신부님

 

 

†찬미예수님

덥지요?

성당안도 덥습니까?

춥지요?

에어컨 끌까요?

에어컨이 빵빵하니까 성당에서 생전 성체조배 안하던 사람들이....  

미사 끝나고 그전 같으면 부리나케 튀어나가던 사람들이 앉아서 성체조배를 한다고 그럽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성령과 성부와 세분이 앉으셔서 오래간만에 망중한을 즐기고

계셨는데...세분이 심심하셔서 그중에 한 어른이신 성부께서 건의 하시기를

“우리 참 오랜만에 모여서 심심한데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주를 한번 보여 봅시다...

먼저 성령께서 뭘 좀 한 번 보여주시지요.”

성령이 어떻게 했겠어요?

순식간에 비둘기 모양이 됐다가, 불의 혀 모양이 됐다가, 정신없이 하니까 막 박수를 치면서

‘야! 역시 그 솜씨가......녹슬지 않으셨군요. ’

“자, 다음에는 성자께서 솜씨를 한 번 보여주시지요.”

마침 그 앞에 갈릴래아 호수보다 더 큰 호수가 있었어요.

“오늘 날씨도 덥고 하니까 물위를 한 번 걸어보겠습니다.”

물위를 쫙~~ 걸어가니까 세상에~~ 어떻게 됐겠습니까?

한 발 딛자마자 폭 빠져 버리는 거예요.

성자께서 홀라당 다 적시고 나와서 얼마나 창피합니까?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두 번 세 번 물위를 걸으려고 애를 써도 여전히 계속 가라앉아.

너무너무 자존심이 상한 예수님께서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고 사태를 파악해봤더니 빠질  발등 사이에서 물이 '꼬로록~~ 꼬로록~~' 올라오는 거야.

그게 무슨 자리?

못 자국!

‘아. 앞으로 기적을 일으키려고 해도 물위를 걷는 기적은 나한테는 불가능한 일이구나!’


포수가 곰을 잡으러 총을 들고 돌아다니다가 너무너무 더워가지고 나무에다가 총을 기대놓고

옷을 훌렁 벗고 냇가로 뛰어들어 멱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나요.

기분이 이상하고 섬찟해서 뒤를 돌아다보니까 삼 미터가 넘는

큰 곰이 이렇게 앞발을 들고 노려보고 있는 거야.

절대 절명의 위기 상황인데 총은 저만치 있고 곰이 앞발로 한번 치면 그냥 죽는 거였어요.

천주교 신자였던 사냥꾼은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화살기도를 쏘았습니다.

‘주님 저 곰에게 신앙을 주십시오. 착한 곰이 돼서 저를 못 잡아먹게 해주십시오.’

화살기도는 하느님에게 올라가서 곰도 즉시 하느님을 믿게 되었어요.

신앙을 가진 곰이 사냥꾼을 쳐다보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주님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을 것을 믿어야죠....곰을 어떻게 믿습니까?

이 세상에 믿을 분은 하느님 한 분 뿐이지요!


사람은 믿는 대상이 아니고 단지 신뢰하려고 서로 애쓰는 존재일뿐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도 있고

내가 저 사람에게 상처받을 가능성도 있다 하는 것을

늘 생각하고 살아야 상처를 덜 받습니다.


하느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에 내 남편이 올라가고

하느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에 내 아내가 올라갔을 때 받을 상처가 얼마나 크겠느냐!


사제는 신자들의 상처를 무수히 듣습니다.

저 같으면 면담이 일 년 반, 이 년 정도가 계속 밀려있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면담을 원하기 때문에 아예 사제관 전화는 받질 않고

휴대폰 번호도 아는 사람외의 것이 아니면 받지 않습니다.

받아봐야 면담하자는 얘기 아니면 피정 얘기이니까...면담에 응하지 못하는 마음이

더 안타깝기 때문에 아예 받질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신자들이 면담하는 내용이 대개가 어떤 얘기일까요?

고통스러운 얘기... 아니면 좋은 얘기? 아니면 기쁜 얘기일까요?

하나같이 상처받은 얘기 아니면 부마자들, 미움의 얘기.....

듣다보면 어떨 때 저도 그냥 같이 푹~~ 가라앉을 때도 있고 따라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죠.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느냐!

유일하게 푸는 방법 한 가지....본당 신자들은 알거예요.

오토바이를 타고 휙~~하고 갔다가 휙~~하고 와요.

 “아이고 신부님, 위험한데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십니까?”

하는데 참견하지 마세요....어차피 25년 전부터 하던 거니까~~

그건 우리 어머니도 못 말렸던 거고, 주교님도 못 말렸던 거니까

지금 이 나이에‘ 타지마라.... 타라...’  얘기하지 마세요.

그나마 그거라도 있으니까 스트레스를 해결하고 살지요.


짧게 살다가는 인생이 전부 다 즐겁고 좋은 일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평탄할 때가 있으면 시련 중 일 때가 몇 배 더 많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시련 중에 자존심 때문에 티를 안내지만 정신적으로 몸부림치고 피를 흘리고

혼자서 눈물을 흘릴 때가 많습니까?

성공할 때도 있지만 실패할 때도 분명 있습니다.

건강, 사람이 주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때는 놀랍게도 성공할 때가 아니라

실패할 때이고, 건강할 때가 아니라 병들었을 때에 하느님을 만납니다.

순풍에 뱃놀이 할 때가 아니라 역풍과 싸워서 이겨나갈 때 하느님을 만납니다.


베드로 전서 4장 12절에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가운데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을 시험하려는 것이니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호들갑떨지 말아라~~’

하느님이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하는 것이니까 놀라지 말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역사를 보건대 구약의 예언자 하느님을 체험했던 모든 이는 모두 고통 중에

하느님을 만난사람입니다.


저 역시도 사제생활을 25년 하면서 기쁠 때...잘될 때... 하느님을 만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제생활 하기 힘들겠다.’

한계 상황이 왔을 때, 저는 늘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한때는 세속적으로 잘나가던 구약의 예언자들, 신약의 사도들 그들이

하나같이 고통 중에 하느님을 만나 새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신약과 구약의 흐름의 중요한 만남의 의미입니다.


오늘 여러분! 1독서 얼마나 섬세하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엘리야는

바위를 깨는 바람 안에도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고

지진에서도 하느님은 없었고

불에서도 하느님은 없었고....

여리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릴 때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1독서에 나오는 엘리야는 우리가 알다시피 갈멜산에서 바알의 숭배자들과 싸워서

그들의 예언자 450명을 쳐 죽입니다.

위대한 승리를 한 엘리야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바알의 신자였던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복수를 다짐합니다.

그 황후가 무서워서 그때부터 엘리야는 무서움에 떨며 죽으라고 도망가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어제의 당당한 승리자가 패배자가 되었고 놀라운 신앙을 증거하던

엘리야가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판단하고 원망합니다.

한마디로 엘리야의 신앙의 위기였습니다.


이제 막다른 자리에서 엘리야는 하느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불속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진 속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바위를 깨는 바람 속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여리고 부드러운 그런 목소리로 하느님은 얘기하십니다.

‘내가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어제의 승리 때문에 니가 자칫 오만해질 까봐 니 스스로

나 아니면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너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이다.’


신약의 위대한 사도였던 바오로도 잘나가던 유대교 랍비였고

그리스도 신자들을 잡아 죽이러 다니던 율법의 인간이었으며

장래가 보장되었던 그였지만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을 말 위에서

체험한 후에 이방인의 사도가 됩니다.

비록 개종을 해서 그리스드교도가 되었지만 교만해질 수 있는 수많은 조건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가시를 박아주셨습니다.


고린토 5서 12장 8절

죽을 듯한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예수님에게 이 가시를 뽑게 해달라고, 이 고통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주시기를 세 번이나 간청했다고 나옵니다.

바오로 사도의 그 가시는 의학자들이 조심스럽게 얘기하기를

‘아마도 바오로 사도는 간질병 환자였을 것이다.’

당시에 간질병은 약도 없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대설교가인 바오로 사도는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발작이 일어나면 거품을 물고 혀를 깨물고.......

나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자존심때문에 너무 너무 괴로워서 죽고 싶었을 겁니다.

‘주님! 나 써먹으려면 이 가시를 좀 뽑아주십시오...정말 창피해서 못살겠습니다.’

세 번이나 간청했지만 주님은 그 가시 뽑아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고린토 후서12장 9절에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이렇게 번번히 얘기하십니다.

이 말을 바오로사도는 받아 삼킵니다.

나의 강함 안에서 주님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 능력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약함 가운데서 주님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을 알고 바오로 사도는 즉시 답을 합니다.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안에 머무르게 하기위하여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

현대 신학은 바오로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바오로 사도는 우뚝 솟은 성인입니다.

바오로의 신학의 그 밑바닥은 고통의 신학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구보다도 교만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바오로 사도에게 심어진 가시 때문에 늘 자기의 약함을 뒤돌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고통 시련은 저주의, 불행의 상징이 아니고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는 축복의 상징입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그 십자가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지옥의 열쇠가 아니라 천국으로

들어가는....내 영혼 구령을 위해 필요한 천국의 열쇠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느껴야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란치스코 성인도 수도회를 만들고 많은 이들이 그를 추종했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성인도 수도회가 승승장구 커져나갔을 때

수도회의 원장으로 살 때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었을 때는 말년에 두 눈이 다 멀어서

장님이 된 후였습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축복인 빛의 축복마저 포기하고

난 다음에 하느님과 일치했고 지복직관의 경지에 이릅니다.

눈이 먼 다음에 썼던 아름다운 시가 태양의 찬가입니다.

‘오~ 아름다워라.’

죽음을 누님이라고 부르고, 고통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솟아오르는 환희의 신비를 고통속에서...두 눈이 다 멀고 난 다음에 비로소 하느님을 눈으로 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 충동에 따라 늘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적극적인 성격 이였지만 많은 경우에는 충동적이었기 때문에 사리분별을 잘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에게 늘 꾸중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늘 후회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궁극적으로는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실패한 순간까지도 언제나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놀라운 사실은 그는 언제나 쓰러졌다가도

반드시 다시 일어선다는 것입니다.

실수를 저지른 후에도 더 가까이 예수님께 나아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쓰러지고 나면 다시 일어서질 못합니다.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도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원망부터 합니다.

‘일으켜 세울 거면 처음부터 쓰러뜨리지 말아야지...사람 쓰러뜨려놓고는 손을 왜 내미냐?’


베드로 사도는 자기의 약함 때문에 쓰러졌지만 다시 일어섭니다.
실수한 후에 놀랍게도 예수님과 사이가 점점...더 가까워집니다.


하느님과 우리들 사이에 끈이 연결이 되어 있다가 죄를 지으면 그 끈이 끊어지지만 회개를

통해서 그 끈을 다시 붙들어 맵니다.

그러면 매듭이 지어지는 만큼 그 자리보다 끈의 길이가 짧아질 겁니다.


그래서 죄가 있는 곳에 은총이 내린다고 했습니다.

성자는, 성인은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쓰러졌다가도 시 주님이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서서 정진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형제가 기업을 운영하다가 부도가 나서 빚잔치를 하고 나니까

총재산 6만원이 남았다고 하소연을 하기에 저는 아주 대범하게 뭐라고 얘기했느냐?

“그 6만원 가지고 있으면 뭐하냐? 오늘 이 자리에서 6만원 깨끗이 봉헌하고 새 출발 해라.”

그 형제는 저에게 화를 내면서 기가 막혀했습니다.

“신부님 참 벼룩이 간을 내먹죠. 전 재산 6만원을 달라고요?”

그러나 그는 이틀 만에 다시 돌아오더니

“신부님 승질내면서 간 거 죄송합니다....집에 가서 생각해보니 신부님이 왜 나한테 그 6만원

 뺏으려고 했는지 이제 깨달았습니다...어차피 망한 것,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완전히

포기하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형제는 6만원을 그 자리에서 봉헌하고 포장마차를 하면서 고생고생해서 지금은

사업에 크게 다시 성공했습니다.

‘기적은 내가 애착하는 것의 마지막 한 조각을 포기할 때 일어난다고 하는 것' .


하느님은 참으로 짓궂은 분 같습니다.

인간이 시련을 통해서 쓰러져 있을 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으로 위대하고 영원한 진리를 전해줍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잔잔해졌다.’

예수님계시는 곳은 어디든지 아무리 강한 폭풍우라도 평온해진다는 진리가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성자 프란시스가 어느 날 동네를 지나가고 있는데

우물가에서 어느 자매가 물을 떠가지고 머리에다 이기 전에 나뭇잎 하나를 그 위에 띄우더랍니다.

옛날에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보신 분들은 아실텐데... 물에 뭘 띄우죠?

성자 프란시스는 물 긷는 아주머니에게 ‘왜 물위에다 나뭇잎을 몇 개 띄웁니까?’

‘이래야만 물이 흘러넘치지 않습니다.’


교우 여러분들, 마음에 근심이 쌓이고 흔들리면 ... 심중에 십자가를 놓으십시오.

영혼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흔들리는 그 마음 한가운데

예수님을 놓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8. 08. 10 (연중 제 19주일) 가르침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감곡이 온이래최고 많이오신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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