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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저 떠나기만 하여라 나머지는 마련하겠다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5 조회수625 추천수9 반대(0) 신고
 
 
 
 

그저 떠나기만 하여라 나머지는 마련하겠다 - 윤경재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마르 6,7-13)


 학창 시절에 농촌 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봉사지로 출발하기 전에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느냐 여러 날을 계획하고 각자 한 보따리씩 짐을 쌌죠. 그런데 막상 봉사지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보니 그곳에서 필요한 물품이 아니라 우리가 도시에서 편리하게 생활하던 물건을 들고 간 것이었습니다. 우리끼리 놀고 즐기는 데 쓸 물건들이었습니다. 정작 농촌에 필요한 물건들은 모두 그곳에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져가야 할 것들은 건장한 몸과 사리지 않고 일하려는 마음가짐이면 충분했습니다.


 자식 같던 우리가 해보지 못한 일을 하느냐 손이 까지고 벌레에 쏘이고 여기저기 아플 것이라며 오히려 위로해 주셨습니다. 때마다 새참거리를 챙겨주셨습니다. 힘들 때 마시라며 농주도 넉넉히 가져다주셨습니다. 밤에는 심심할 거라며 수박, 참외 등 과일 하며 감자, 옥수수 등을 머물던 학교로 가져다주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농촌에 아이들이 많아 밤에는 야학을 열었고 아이들과 오락하며 재미나게 지냈습니다. 그렇게 보낸 열흘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훌쩍 지나갔습니다. 우리가 준비해 간 물품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다시 가져왔습니다.


 따지고 보면 도움을 주러 갔지만 폐만 끼치고 온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농촌 일이 손에 설어 오히려 그분들을 두 번 일하게 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농활은 도시생활에서 떠나 그분들과 함께 살 때 의미가 있습니다. 거기에 가서도 내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려 들면 아무 도움이 못 됩니다. 방해만 될 뿐입니다.


 선교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들고 가는 짐, 내게 익숙한 생활방식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만 두드러지게 할 뿐입니다. 내게 필요한 물건뿐만 아니라 습관마저 버리고 떠나야 쉽게 그들과 동화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정신마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려는 자세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 것을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로 필요한 한 가지는 그들을 어루만져 주려는 마음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신 까닭이 복음 선포 여행을 보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들에 추수할 것이 많아져 추수할 일꾼을 뽑으신 것입니다. 추수군은 몸뚱이 하나면 충분합니다. 필요한 것은 모두 일터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일터에 마련돼 있지 않은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능력뿐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고 말로만 아무리 외쳐도 막상 들어줄 사람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하려면 먼저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고 꼭 필요한 것을 내어주고 가려운 데를 긁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단순히 예수님께 배운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익힌 친교의 정신을 속속들이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교여행은 일정 기간을 정하고 떠나는 여행이 아닙니다. 언제 끝날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기약 없는 여행길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날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길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해야 하는 길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마태오와 루카복음서에서는 아무것도 들고 가지 말라고 되어 있지만, 특이하게 마르코 저자는 지팡이와 신발만은 신으라고 썼습니다. 왜 그랬을까? 하고 묵상해봅니다. 최소한의 것은 허용하라는 말이 아니라 더 깊은 뜻이 담겼습니다. 이는 마르코 저자가 선교여행을 직접 경험해본 흔적입니다. 지팡이는 사나운 동물들의 위해로부터 보호해 주는 도구이며 신발도 오랜 여행을 견디게 해줍니다. 또 여행자라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며 스스로 정처 없는 여행자로서 인식하라는 뜻입니다. 마치 지금의 선교사가 선교여행을 떠날 때 기도서와 성경을 들고 가는 식입니다.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마라.”는 표현도 색다릅니다. 매우 유대 식 표현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표현을 몰랐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속옷인 튜닉에 겉옷인 가운을 겹쳐 입었습니다. 집에서나 일할 때는 튜닉차림으로 있었지만, 외출할 때는 겉옷을 더 걸쳐 입었습니다. 겉옷은 그 사람의 권위와 신분을 상징하고 빈부격차를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겉옷만으로도 남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여벌의 옷을 지니지 말라고 하신 게 아니라 권위의식에 빠지지 마라는 경구로 사용하신 듯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요청은 엄청나게 들리지만, 잘 새겨들으면 인간적인 나약함에서 나오는 의뢰심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만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인간적 제약에서 자유로워지라는 요청입니다. 지금 그 상태면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능력을 더 쌓고서, 시간이 없어서, 배운 게 부족해서, 돈이 없어서 등등’은 모두 핑계라는 말입니다. 그저 떠나기만 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마련하신다는 보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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