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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1 조회수594 추천수7 반대(0) 신고

 

 

 

연중 제4주일 -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제가 가장 힘이 솟고 팔팔할 때는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남자라면 이 때 누구와 싸워도 이길 것 같은 자신감이 생깁니다. 저도 싸움은 하지 않았지만 운동은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도 싸움 잘하는 아이들의 패거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저의 친구에게 이것저것 시키더니 결국엔 발로 등을 찼습니다. 저는 참을 수 없어서 그 아이 중간에 막아섰습니다. 그런데 그 때리던 아이는 놀랐는지 뒤로 자빠졌습니다.

창피해서 그랬는지 내가 자기를 때렸다고 하며 마구 흥분하였습니다. 저는 싸울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제 얼굴을 때렸습니다. 그러나 마치 솜으로 맞은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회심의 일타를 때렸다고 생각했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 저를 보더니 움찔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교실 뒤로 가더니 마대자루를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말려서 결국 원치 않았던 싸움은 그렇게 끝나버렸습니다.

그 아이가 무기를 든 이유는 맨 손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으로 보면 이미 그 아이가 싸움에서 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아이들은 떼거리로 다니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있는 편을 택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국회에 계시는 어른들까지 서로 더 자기가 세다고 난리법석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높아지고자 하는 권력의 욕구는 정치판에서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 위에 서기 위해서는 상대방보다 더 뛰어난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뛰어난 것을 권력을 위해 사용할 때 그 모든 것들은 ‘폭력’이 됩니다.

전 세계 역사에서 권력을 쥐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는 없습니다. 힘이든 돈이든 지식이든 무엇을 이용해서라도 다른 사람 위에 있기를 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폭력이 됩니다.

 

얼마 전엔 어떤 자매님이 딸이 결혼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딸을 실내화를 벗어서 때리다가 결국 눈이 붓고 충혈 되어 겁을 잔뜩 집어먹었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머니로서 자녀를 복종시키고 싶은데 그래서 결국 사용하는 것이 폭력인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께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이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합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뭐라 해도 침묵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무시하는 이 침묵의 행위는 어쩌면 말대꾸 안 하는 것처럼 위장되어 있을지라도 결국 부모의 화를 더욱 돋우는 무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 높아지려고 할 때 서로간의 사랑이 깨지고 있음을 좀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남편의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아내가 사랑스러울 사람이 누가 있으며 대드는 자녀들이 사랑스러울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폭력으로 얻은 권력은 오히려 그 사람의 참다운 권위를 떨어뜨립니다. 아이들이 당장 때리는 부모의 말을 듣기는 하겠지만 커서 독립하면 그래서 더 이상 부모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되었을 때에도 그 권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다 성장한 자녀들이 부모의 그런 폭력성을 기억하며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들 것입니다.

로마의 위대한 시저도 온 세상을 정복했지만 결국 동료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세기의 정복자 나폴레옹도 쓸쓸한 유배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런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허무한 권력을 위해서 세상엔 얼마나 많은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까? 단순한 예로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자주 서로 주먹질과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보면 알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뿌리는 바로 이 권력욕, 성욕, 재물욕인데 그 중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권력욕이라합니다. 그래서 재벌들이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이고 이태리만 보아도 최고 거부인 사람이 오랜 시간 수상을 몇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본성을 거슬러 새로운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데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었지만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계셨다고 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신학박사들입니다. 예수님은 초등학교도 안 나왔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영을 한 마디로 내쫓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맞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헤로데도 로마의 황제도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에게 조정당할 수도 있는 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러운 영까지도 한 마디로 누를 수 있는 권위를 지니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이런 권위를 지닌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독립시키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줄 줄 알았는데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매 맞고 비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더러운 영까지도 제압하고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던 그 힘은 어디로 가고 실제로는 양처럼 온순하게 도살장에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그분의 힘과 권위를 보게 됩니다. 죽었던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권위는 이 세상의 권위와는 전혀 다름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은 폭력으로 힘을 얻으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순종과 비폭력으로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참다운 권위와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 있는 권위들조차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누구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권위와 힘은 바로 성령님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도 계속 누가 서로 높은지에 대해 다투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세상의 권위에만 눈이 멀어 있는 제자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아 열 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낮아지는 사람만이 그 안에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 참다운 권위를 지니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성모님의 경우 사도 중에 들지 않았어도 그 겸손하심으로 성령님으로 충만하셨고 그래서 참다운 권위로 따지자면 성모님이 사도들 위에 서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사도들의 모후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겸손해진 사도들도 급기야 성령강림으로 참다운 권위를 입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베드로는 그 날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에게 세례를 줍니다.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은 죽기를 원하지 않는 한 사람을 위해 대신 죽기로 자청합니다. 그냥 죽는 것도 아닌 굶어 죽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에도 가족이 있는 사람보다는 자신이 죽는 편이 낫다고 간수를 설득합니다.

세상 어떤 권력가도 죽음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죽음도 이기는 위대한 권력가들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이 세상 참다운 권위와 힘을 누리며 살아갑시다.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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