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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어린양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9 조회수756 추천수10 반대(0) 신고

 

 
 
스승 요한이 일러준 “하느님의 어린 양”이란 말 때문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간다.
요한이 자기 제자 둘을 예수님께 이적시킨 셈이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예수님이 뒤 돌아서서 두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그러자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첫마디가 나온다.
“무엇을 찾느냐?”
복음서가 총 네권인데 다른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마디는 무엇일까?
재미있을 거 같으니, 한번 찾아보자.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이 첫 마디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
마태오 복음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3,15)
루카 복음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
요한복음은? “무엇을 찾느냐?”(1,38)
먼저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의 첫 마디,
“때가 찼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하고 말씀하셨는데
때가 찼다는 말씀의 때는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아주 결정적인 때를 가리킨다.
여러분에게 결정적인 때는 어떤 때인가?
사람 마다 결정적인 때가 있다.
어떤 때가 결정적인 때인지 알아보기 위해 옛날 이야기 좀 해 보겠다.
옛날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농사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소는 보물 1호 같은 존재다.
하루 일과중에 아주 큰 일과가 바로 소가 일용할 양식을 먹이기 위해 온 동네가 함께 산으로 풀을 뜯기러 가는 일이다.
그런데 소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났다고 치자.
이때 소는 어떻게 할까?
도망칠까? 아니면 호랑이와 싸울까?
도망친다고 생각하는 분? 아니다 호랑이를 들이받으며 싸운다고 생각하는 분?
그렇다 소도 짐승이기 때문에 자기를 해치는 짐승을 만나면 일단 싸운다.
이 때 소를 버리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기를 버려두고 도망치는 주인을 보고 소가 달려들어 주인을 뿔로 받아버린다.
결정적인 때는 바로 이런 때다.
가족에게, 남편이나 아내에게 친구나 이웃에게 이런 결정적인 때에 배신하면 죽음을 자초하게 된다.,
예수님이 마르코 복음에서 외친 첫 마디, 때가 찼다는 말씀도 같은 뜻으로 알아들으면 된다.
결정적인 때는 예수님이 오신 때다 그분이 왔으니 그분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 뿔에 들이받히듯이 죽음을 자초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마디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그래야 모든 의로움을 이루게 된다.”이다.
죄 없이 가장 깨끗한 분, 즉 예수님,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죄 많은 이 세상,
즉 우리들이 받는 세례를 받는 것이 의로움을 이루는 것이란 뜻이다.
의로운 분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하시는 대로 두는 것이 의로움이다.
한자 속에 들어 있는 성경이야기를 풀이한 사람이 있다.
그 가운에 의로움을 뜻하는 한자 옳을 의자는 양 양(羊) 자 밑에 나 아(我) 자가 있는 모습인데,
이것이 바로 의롭다는 뜻이라고 풀이 했다.
양은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다.
우리가 예수님 위에 있지 않고 예수님 밑에 처신하는 것이 의로움을 이루는 것이란 뜻이다.
참으로 그럴법한 설명이다. 아니 그럴법한 것이 아니라 딱 들어맞는 설명이다.
세상에 정의가 사라지고 전쟁과 폭력과 거짓과 사기가 판을 치는 이유는
인간들이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마디는
“왜 저를 찾았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다.
얼마나 딱 부러지는 말씀인가? 우리가 마땅히 의로움을 이루려고 한다면
세상이라는 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 성전, 신앙의 집에 머물러야 한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마디는,
“무엇을 찾느냐?”이다.
이 물음에 두 제자는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대답하였다.
물음에 물음으로 대답했지만 그분이 어디서 어떻게 사시는지 알고 싶다는 대답이다.
이 대목에서 창세기가 연상된다. 아담이 범죄하고 앞을 가리고 숨었을 때 하느님이 아담을 찾는 목소리.
“너 어디 있느냐?” 우리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범죄해서 부끄러워 앞을 가리고 하느님을 피해 숨은 인간,
지금 우리들 모습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다.
그 목소리는 지금도 우리에게 묻는다. “너 어디 있느냐?”
마치 창세기의 그 목소리처럼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오는 두 명의 첫 제자들에게 묻는다.
“무엇을 찾느냐?”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무엇을 찾아서 살아가고 있는지 물으신 것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찾아서 이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는가?
서로 오해하고 그래서 미워하고 음해하고 덜미를 잡기 위해 애를 쓰고,
덜미 잡힌 사람은 복수를 다짐하는 이 인생살이 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찾아서 살아가고 있는가?
뽀빠이 이상용씨가 어느 곳에서 강연한 내용인 듯 한데 의미있는 말이 있어서 옮겨 본다.
장수마을에 갔더니 106세 어르신이 계셨습니다.
“장수 비결이 뭡니까?”
“안 죽으니깐 오래 살지!”
“올해 몇 살이세요?”
“여섯 살밖에 안 먹었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
“100살은 무거워서 집에다 두고 다녀.”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이 장수의 비결이란 얘기지요.
시골장터를 지나가는데, 앞에서 90세가 넘어 뵈는 할머님이 걸어오십니다.
옆에서 같아 가시던 105세 어르신이,
“형님, 저 할머니 한번 사귀어 보시죠? 한 70 넘어 뵈고 예쁘시구먼.”
“뭐야? 이놈이! 저 늙은 할망구 데려다 뭔 고생하라고.”
그렇습니다. 할머님이 그 얘길 들었으면 자살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저, 어르신. 106년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르신을 욕하고 음해하고 그래서 열 받았을 텐데,
그걸 어떻게 해결하고 이래 오래 사세요? 우리 같으면 못 참고 스트레스받아 미쳐 죽었을 텐데요.”
그랬더니 너무나 간단한 답을 주셨습니다.
“그거야 쉽지. 욕을 하든 말든 내버려뒀더니 다 씹다가 먼저 죽었어.
나 욕하던 녀석은 세상에 한 놈도 안 남았어.”
고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저희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셨습니다.
“영철이 커서 뭐 될래?” “네 저는 우주과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영숙이는?” “저는 여자니까 애 낳고 평범하게 살래요.”
“상용이는?” “저는 큰 꿈은 없고요. 영숙이가 애 낳는데 협조하고 싶습니다.”
누굴 부러워하지 마세요. 재벌들 다 돌아가시죠?
권력가들 다 돌아가시죠? 차 좋은 거 타는 사람도 언젠간 다 죽죠?
죽는 게 사실이라면 사는 동안에 즐겁게 사셔야 할 거 아닙니까?
이상, 뽀빠이 이상용씨가 어느 강연에서 한 내용이다.
고달픈 인생길에서 우리가 찾는 것도 바로 즐겁게 사는 일일 것이다.
하느님께서도 그걸 바라시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
사람의 행복은 계속해서 후손을 낳고 번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땅과 모든 짐승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배하고 다스리는 대상이 동족인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땅과 짐승을 다스리지 않고
한 형제인 사람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것이 의로움을 거스리는 것이다.
의로움을 이루기 위해 당장 거두어야 할 것이 바로 한 형제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하느님의 같은 백성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자손을 번성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 때문에 예수님도 마지막 만찬상 앞에서 다른 모든 계명을 뛰어넘는 사랑의 계명을 주셨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다.
오늘 요한의 두 제자는 그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을 통해 알고 싶어했다.
“랍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무엇을 찾느냐고 “무엇”에 대해 물었는데,
제자들은 “어디에” 그 “무엇”이 있는지 물은 것이다.
왜냐 하면 그 “무엇”이 바로 예수님 당신이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던진 물음을 통해,
우리가 찾고 있는 그 “무엇”이 바로 당신 자신인 것을 계시하신 셈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결정적인 것, 우리가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의로움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그분이시다.
그분을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한다.
그 말 그대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셨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찾고 있는 결정적인 그 무엇이시고 의로움 자체이신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 곧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셨고,
그리하여 우리 또한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어야 할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와서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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