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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 : 다산을 찾아서( 다산 초당)
작성자배봉균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9 조회수411 추천수8 반대(0) 신고

 

 

다산을 찾아서( 다산 초당)

 
신희상
 

(퍼온 글)

 

 

다산을 찾아서  - 다산 초당

 

 

다산초당 가는 길

 

 

[다산 초당과 일지암 가는 길]

    2001년 5월 5일 토요일, 다산이 200년 전 유배를 떠난 그 길을 따라 다산을 찾아간다. 같이 근무하는 학교의 선생님 두 분과 딸아이가 이번 순례의 동반자가 되었다. 어린이날이라 함께 놀아주지 못하는 대신 아홉 살 딸아이에게 특별한 여행을 선물한다며 새벽같이 깨워 출발하였다. 호남고속도로의 광산I.C에서 빠져나와 광주, 나주, 영암의 월출산을 곧장 지나쳐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 땅으로 들어왔다.

    다산 선생님은 1801년 경상도 장기 유배지에서 다시 이곳 강진 땅으로 유배되어 네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1801년 강진의 동문 밖 주막집에서 4년 간 우거하였는데, 그 곳을 사의재(四宜齋)라 하였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며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며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며 동작은 마땅히 후중하게 해야 하니 이런 때문에 그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四宜之齋)이라고 하였다.  1805년 겨울에는 혜장스님(1772∼1811)의 주선으로 강진읍내 보은산방(寶恩山房, 高聲寺)에서 기식하였다. 이곳에서 《주역》연구서를 저작하였으며, 아들에게 《상례》와 《주역》을 가르치셨다. 그 때의 모습을 다산선생님은 시(詩)로 전하고 있다.

      우두봉 아래 조그마한 선방에는
      쓸쓸하게 대나무가 낮은 담 위로 솟았구나
      바다의 바람에 밀리는 조수는  산밑 절벽에 이어지고
      읍내의 연기는 겹겹의 산줄기에 깔렸네

[고성사]

      둥그런 나물 바구니 죽 끓이는 중 곁에 있고
      볼품없는 책상자는 나그네의 여장이라
      어느 곳 청산인들 살면 못 살리
      한림원 벼슬하던 꿈 이제는 아득해라

                   - <제보은산방(題寶恩山房)> 

    1806 가을에는 학래 이청(學來 李晴)의 집에 있다 가, 1808년 봄에야 다산으로 들어와 살았다. 읍내에서 살았던 게 8년이고 다산에서 살았던 것이 10년  이다. 그렇게 18년 유배지 강진땅은 다산이 되었고, 다산은 강진이 되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을 부르고 있다.  강진읍내의 사의재와 고성사의 보은산방 등 선생님의 유배생활 흔적을 차례대로 더듬어보려고 하였지만 큰 목적지인 다산초당을 소홀히 할까봐서 곧장 강진읍내를 벗어났다. 강진만을 왼쪽으로 하면서 길을 따라 가면 귤동마을이 나오고 조금 더 가다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만덕산 자락에 넓게 자리한 다산 유물 전시관을 나타난다. 이곳은 다산초당 오르는 입구이다.

     

    이강길

    봉우리 - 양희은 ▶를 누르세용

다산유물전시관

[다산유물기념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을 때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스크린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영상실은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7분 동안 상영되는데 관광객이 영상실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상영되므 로 누구나 불편 없이 관람할 수 있다.

    빽빽한 나무로 둘러진 좁은 비탈길을 올라 초당을 오르는 길은 때마침 어린이날이라 다산을 가르치고자하는 뜻 있는 부모의 손을 따라 어린 아이들도 함께 올랐다. 초당 오르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길이겠지만 오르는 사람은 옛사람이 아니다. 이 어린이들은 장래에 나라의 큰 동량이 될 것이며 훌륭한 목민관이 될 것이다.  

다산초당

[어린이날, 딸 아이와 다산초당앞에서]

    정약용 선생님은 귀양살이 8년째 되던 1808년(순조8) 봄. 만덕산 귤동 마을에 터 잡고 살던 해남 윤씨들의 배려로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일찍 돌아가신 선생님의 모친이 공재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증손이니 귤동마을 해남 윤씨 집안은 선생님의 외가 친척들이다.
    이곳에서 유배가 풀릴 때까지(1808∼1818) 본격적인 학문탐구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등 방대한 저술활동이 이루어졌다. 사적 제107호인 다산 초당은 강진만(구강포)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18년의 유배 생활 가운데 10년을 지냈던 곳으로 다산의 체취가 그대로 간직된 다산4경(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을 볼 수 있다.

[초의선사의 다산초당도]

    그때의 다산초당은 말 그대로 조촐한 초가삼간이었다. 얼마 전 발견된 초의선사의 [다산초당도]는 초당과 동암이 모두 초가로 그려져 있고, 연지석가산 연못 아래에 지금은 없는 작은 연못이 하나 더 그려져 있다. 세월이 흐르고 무너져 폐가가 된 것을 1958년에 다산유적보존회가 현재와 같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瓦家(와가) 팔작 단층기와집으로 중건하고 후에 선생님께서 생활하셨던 동암(東庵)과 제자들이 유숙한 서암(西庵)을 복원한 것이다.
    초당에 걸린 '다산초당' 현판과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寶丁山房: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 현판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그중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여기저기서 집자해 만든 것이지만 '보정산방'은 김정희가 중년쯤 되었을 무렵 일부러 쓴 것 인 듯, 명필다운 능숙한 경지를 보인다. 정약용 선생님의 24년 연하인 추사 김정희는 동배친구 초의선사와 더불어 정약용을 따르며 몹시 존경했다. 한편 동암에는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동암'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 있다.

['다산초당' - 추사 김정희 서체 집자 현판]

['관어재' - 다산초당 현판]

다산초당 4경

    다산초당의 툇마루에 앉아 앞을 내다보았지만 동백숲과 잡목으로 우거져 보일 것이 없다.단지 뜰 앞에 '다조(茶 )'라고 해서 차를 달였던 넓적한 돌이 하나와 왼쪽의 연못, 오른쪽 바위에 새겨놓은 '정석(丁石)' 만이 선생님 유배당시의 정취를 느끼게 해 줄뿐이다. 선생님은 유배에서 풀려난 지 3년 되는 1821년, 당시 회갑을 앞두고 자신의 묘비에 새길 장문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쓰셨다. 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글에 의하면 다산초당의 모습은 이러했다.

      "무진년(1808) 봄에 다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축대를 쌓고 연못을 파기도 하고 꽃나무를 벌여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기도 했다.
      동서로 두 암(庵)을 마련하고 장서 천여 권을 쌓아두고 저서로서 스스로 즐겼다.
      다산은 만덕사의 서쪽에 위치한 곳인데 처사 윤단의 산정(山亭)이다. 석벽에 '丁石(정석)' 두 자를 새겼다."

[정석]

    dia_gray.gif 정석(丁石)

      죽각(竹閣)서편 바위가 병풍같으니
      부용성(芙蓉成)꽃주인은 벌써 정씨(丁氏)에게 돌아왔네
      학이 날아와 그림자지듯 이끼무늬 푸르고
      기러기 발톱 흔적처럼 글자는 이끼속에 또렸하다.
      미로(迷路)처럼 바위를 경배하니 외물(外物)을 천시한 증거요
      도잠(導潛)처럼 바위에 취했으니 제몸 잊은 것을 알리라
      부암(傅巖)과 우혈(禹穴)도 흔적조차 없어졌는데
      무엇하러 구구하게 또 명(名)을 새기리오

    정석(丁石)은 해배를 앞두고 그의 발자취를 남긴다는 뜻에서 초당 뒤 언덕바위에 선생님이 친히 새긴 것이다. 선생님의 정갈하고 꼿꼿한 기품이 느껴지는 글씨다.

    dia_gray.gif 약천(藥泉)

[약천]

      옥정(玉井)이 흐레는 없고 모래만 깔렸으니
      한바가지 떠마시면 찬하(餐霞)보다 상쾌하다오
      처음엔 돌틈의 승장혈(承漿穴)을 찾았는데
      도리어 산중에서 약닳이는 사람이 되었네
      길을 덮은 연한 버들 비스듬히 물에 떠있고
      이마에 닿은 작은 복숭아 거꾸로 꽃을 달고 있네
      담도 삭이고 묵은 병도 낫게하는 약효는 기록할 만하고
      나머지 또 길어다가 벽간다(碧磵茶)끓이기에 좋다오

    초당의 왼쪽 뒤편에는 작은 옹달샘이 하나 있다. 1808년 다산선생님께서 직접 파서 만든 샘으로 이 물로 차를 끓여 마셨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시원한 약수 샘이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서 있다'는 선생님의 절절한 고독은 약천의 물로 끓인 다산의 차로서 다스리며 다선(茶禪)삼매를 즐겼으리라.

[다조]

    dia_gray.gif 다조(茶조-부엌조)

      푸른 돌 평평히 갈아 붉은 글자 새겼으니
      차 끓이는 조그만 부뚜막 초당 앞에 있구나
      반쯤 다문 고기목 같은 아궁이엔 불길 깊이 들어가고
      짐승 귀 같은 두 굴뚝에 가는 연기 피어나네
      솔방울 주어다 숯 새로 갈고
      매화꽃잎 걷어내고 샘물 떠다 더 붓네
      차 많이 마셔 정기에 침해됨을 끝내 경계하여
      앞으로는 단로(丹爐)를 만들어 신선되는 길 배워야겠네

     

    초당 앞마당에 종아리 높이까지 오는 크고 넓적한 바위가 하나가 놓여 있다. 다산선생님께서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이던 부엌이다. 뒤꼍 약천에서 맑은 물을 떠다가 앞마당 다조 위에서 솔방울을 지피며 차를 끓여 마셨던 선생님은 유불(儒佛)이 하나이며 다선(茶禪)이 하나이며 물아(物我)가 하나임을 즐겼을 것이다.

    dia_gray.gif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연지석가산]

      갯가의 괴석 모아 산을 만드니
      진짜 산보다 만든 산이 더 멋지구나.
      가파르고 묘하게 앉힌 삼층탑 산
      오목한 곳 모양 따라 한가지 소나무를 심었네
      서리고 휘감긴 묘한 모습 지봉석을 쭈그리고 앉힌 듯 뾰족한 곳 얼룩 무늬 죽순이 치솟은 듯
      그 위에 산 샘물을 끌어다 빙둘러 만든 연못
      물밑 고요히 바라보니 푸른 산빛이 어렸구나

    초당 오른편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보인다. 이것은 다산선생님께서 바닷가의 돌을 줍고 연못을 파서 연과 잉어를 키우고, 물 가운데는 석가형상의 돌을 놓아 연지석가산이라 이름하였다. 얼마전 비가 온 듯 연못의 물은 흙탕이다. 그러나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석가산은 또 하나의 세계가 물 위에 떠 있는 듯하다. 초의선사의 [다산초당도]에 따르면 이 연지의 물은 지금은 없어진 초당 축대 아래의 또 다른 작은 연못을 흘러가고 있다.

동암

[다산초당의 서암]

[다산초당의 동암]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마자 처음 만나는 집은 '茶星閣(차성각)'이란 현판이 걸린 서암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집으로 동암과 함께 1974년에 중건되었다. 서암은 주로 다산초당의 주인인 윤단의 아들과 손자들로 이루어진 제자들의 거처과 교실로 사용했다. 초당의 연지못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동암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 집으로 역시 1974년 다산유적복원위원회가 중건하였다. 다산 선생님의 숙소로 사용되었는데, 다산선생님의 집자 '다산동암'과 추사 김정희의 서체 '보정산방'이 걸려있다.

    이곳은 다산 선생님은 수많은 책을 저술하시며 우리나라 실학을 집대성한 산실이기도 하다. 일명 송풍암(松風庵)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동암 근처에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바람이 불어오는 암자라 하여 불리게된 이름이다. 선생님의 고독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전해지는 선생님의 일기와 시화는 그 삶의 단면을 어느 정도 추측하게끔 한다.

      "9월 12일 밤, 나는 다산의 동암에 있었다. 우러러보니 하늘은 적막하고 드넓으며, 조각달이 외롭고 맑았다. 떠 있는 별은 여덟 아홉에 지나지 않고 앞뜰엔 나무 그림자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옷을 주워 입고 일어나 걸으며 동자로 하여금 퉁소를 불게 하니 그 음향이 구름 끝까지 뚫고 나갔다. 이때 더러운 세상에서 찌든 창자를 말끔히 씻어버리니 이것은 인간세상의 광경이 아니었다."

['보정산방' - 추사 김정희 친필 동암현판]

['다산동암' - 다산 선생님 글씨 집자 현판]

    또한 선생님은 이곳에서 다음과 같은 사연을 적은 [매화와 새] 시화를 짓는다.

[다산선생님께서
딸 아이에게 보낸 그림]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한 지 수년 됐을 때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부쳐왔는데,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가셨기에 가위로 잘라서 네 첩(帖)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나머지로 이 족자를 만들어 딸아이에게 준다."

    그림에는 4언 율시가 다음 같은 뜻으로 씌어 있다.

      파르르 새가 날아 내 뜰 매화에 앉네
      향기 사뭇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
      이제 여기 머물며 너의 집을 삼으렴
      만발한 꽃인지라 그 열매도 많단다.

    별과 나무와 꽃과 새, 그리고 바람과 구름 등 자연을 벗삼으며 고독을 달래고 학문과 시화로 유유자적하셨던 선생님의 여유가 너무도 고고하여 유배객의 심사처럼 느껴지지 않기도 하다.

천일각

    동암에서 약간 높은 언덕을 몇 걸음 오르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여 한눈에 구강포(강진만)가 시원스레 들어오는 천일각이 있다.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저 바다 건너 흑산도로 유배가신 둘째 형님 약전에 대한 그리움을 애달프게 바람에 실어보내며 한숨짓던 산언덕이었는데, 후에 다산유적 보존회에서 그 자리에 천일각을 세운 것이다.

    천일각을 뒤로하고 동암의 지붕을 내려보면서 다산과 혜장이 오고가던 백련사 가는 산길을 나도 간다.

[천일각]

[천일각에서 내려본 구강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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