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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 : 다산 정약용의 勉學文(면학문)
작성자배봉균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9 조회수1,158 추천수8 반대(0) 신고

 

 

다산 정약용의 勉學文(면학문)

 
정약용
 

 

 

 다산 정약용의 勉學文(면학문) - 펌

 

그러나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다산이 써준 면학문(勉學文)이다. 황상에게 다산이 직접 써준 글이다.


1802년 임술년 10월 17일, 강진의 한 주막에서 서로 대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증산석’(贈山石)은 다산이 15세의 황상을 처음 만난 1802년 10월,

어린 제자에게 학문을 권하며 쓴 글이다. “내가 산석(山石:황상의 아명)에게

문사(文史)를 닦도록 권하니 그는 머뭇머뭇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저는 세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둔하고, 둘째 막혀있고,

셋째 미욱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말하기를 ‘공부하는 자는 세가지

큰 병통이 있는데 너에게는 해당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공부하는 자들이 갖고 있는 세 가지 병통을 너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첫째 기억력이 뛰어난 병통은 공부를 소홀히 하는 폐단을 낳고,
둘째 글 짓는 재주가 좋은 병통은 허황한 데 흐르는 폐단을 낳으며,
셋째 이해력이 빠른 병통은 거친 데 흐르는 폐단을 낳는다.
둔하지만 공부에 파고드는 자는 식견이 넓어지고,
막혔지만 잘 뚫는 자는 흐름이 거세지며,
미욱하지만 잘 닦는 자는 빛이 난다.
파고드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뚫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닦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그렇다면 근면함을 어떻게 지속하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갖는 데 있다.”

황상은 이 글을 ‘삼근계’(三勤戒)로 마음에 새겨 평생 간직한다. 황상이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게 된 것은 순전히 스승의 가르침 덕분이다. 황상은

스승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시를 주고 받으며

사제관계를 이어간다.

 

이강길

봉우리 - 양희은  ▶를 누르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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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 연보

 

 

1762년 (영조 38)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 (현재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다산(茶山).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 두서(斗緖)의 손녀. 약현(若鉉)·약전(若銓)·약종(若鍾)의 동생이며, 이승훈(李承薰)의 처남

1770년 (영조 46)

어머니가 돌아가심

1776년 (정조즉위)

풍산홍씨(豊山洪氏)와 혼인.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1777년 (정조  1)

처음으로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보고 감명을 받음

1783년 (정조  7)

생원시 합격

1784년 (정조  8)

이벽(李蘗)을 통해서 서학(西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

1789년 (정조 13)

식년문과에 갑과 2등으로 급제

1792년 (정조 16)

아버지 돌아가심. 홍문관 수찬으로 재임중 수원 화성(華城) 축조를 위한 기중가도설(起衆架圖說)을 지어 올림

1795년 (정조 19)

동부승지, 병조참의 역임. 정조의 화성 행차 수행. 주문모(周文謨) 신부 사건에 둘째 형 약전과 함께 연루되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 이때 <서암강학기 西巖講學記> <도산사숙록 陶山私淑錄>을 저술

1796년 (정조 20)

우부승지, 좌부승지 역임

1799년 (정조 23)

형조참의 역임. 반대파의 무고를 받아 <자명소 自明疏>를 올리고 사직

1800년 (정조 24)

정조의 명을 받고 상경했으나 정조가 갑자기 죽음

1801년 (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薪知島)로 유배되고, 셋째형 약종은 옥사함.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옮겨짐

1808년 (순조  8)

거처를 옮겨 다니다가 다산초당에 자리를 잡음. 이후 다산초당이 다산학의 산실이 됨

1811년 (순조 11)

우리나라의 지리를 지역별로 해설한《아방강역고 我邦疆域考》저술

1817년 (순조 17)

《방례초본 邦禮草本 - 후의 경세유표 經世遺表》미완성본 저술

1818년 (순조 18)

《목민심서》저술. 강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마을로 돌아옴

1819년 (순조 19)

형벌과 재판에 관한 책인《흠흠신서 欽欽新書》, 민간에서 사용하는 한자말의 어원을 풀이한《아언각비 雅言覺非》저술

1836년 (순조 36)

마현마을의 생가에서 사망. 생가의 뒷동산에 안장됨

1883년 (고종 20)

다산의 모든 저술을 모은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가 내각에 보관됨

1910년 (융희  4)

정2품 정헌대부 규장각제학에 추증되고 시호를 문도(文度)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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