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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3 - 송봉모 토마스 S.J.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6 조회수808 추천수5 반대(0) 신고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 3


   성서의 인물들도 우리와 똑같습니다. 살아서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인물들입니다. 이들도 똑같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 질문을 외쳤습니다. 고통 앞에서 자기들이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지요.


   통상 우리들은 "고통" 하면 욥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도 욥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겁니다. 의인 중에 의인으로서 살아가다가 갑작스럽게 재앙을 만나서 자녀들과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은 심한 피부병으로 고생하며 살았던 그 욥이 강한 분노의 목소리를 하느님께 외치는 겁니다.


   욥기, 욥이 외쳤던 그 외침이 무려 36장까지 계속되는데요. 그 36장까지 외침을 요약하면 딱 두 마딥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두 마디로 요약됩니다.


   나는 죄를 지은 게 없다는 겁니다. 어째서 비참한 지경에 처한 자에게 빛을 주었으며, 마음의 고통이 심한 자에게 생명을 주었습니까? "어째서 죄를 지은 적이 없는 나에게." 욥의 외침이 이 딱 두 마디 입니다.


    "도대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어째서 이런 일이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 말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질문입니다. "도대체 내가 받고 있는 이 고통의 원인이 뭐냐?" 이겁니다.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나는 고통의 희생물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 고해의 바다라고 얘기하고 있지요? 우리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번뇌의 모든 숫자를 밝혀서 고통의 희생물이 된 그 억울함을 정말 해결하기라도 하는 듯이 번뇌의 숫자를 모두 밝히려 했던 불가에서는 108개의 번뇌를 정리했습니다.


   그러면서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추구해 갔었죠. 불가에서 얘기하는 고통의 원인은 이것입니다. 태어난다는 것, 늙는다는 것, 병든다는 것, 죽는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해야 된다는 것, 생의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겁니다.


   간단히 얘기하면 인간의 몸End아리 자체가 인간 몸뚱아리를 구성하는 온 자체가 온통 고통이라는 겁니다. 왜 고통인가 하면 인간 존재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항상 있는 불변의 무엇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무상하기 때문에 모든 유속물이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과 빛처럼 싱싱하고 맑은 그 뺨결이 어느새 쭈글쭈글한 노인의 살결로 변해버립니다. 영원히 살아갈 것 같던 그 여인이 언젠가 내 손에서 떠나버립니다. 무덤에 묻혀버립니다. "왜?" 무상하기 때문에. 이것이 불가에서 얘기하는 고통의 원인입니다.


   그럼 우리가 믿고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하느님, 예수님이 종교에서 도대체 고통의 원인을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가? 불가 식으로 얘기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끝. 참고 견뎌라. 그래서 성서에서 얘기하는 하느님과 예수님이 얘기하는 고통의 원인들에 대해서 우리가 이제부터 좀 보겠습니다.


   무려 다섯 개의 원인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씨름이 치열했다는 것입니다. 하나 ,하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면 첫 번째 의견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의 그릇된 행위 때문이라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나무의 과일을 따먹었을 때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읽어 봅니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저주를 받으리라."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이것이 고통의 원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릇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겁니다. 좀 더 자세하게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을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방금 읽어드린 이 짧은 네 개의 구절에서 수고, 고통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모릅니다. 이 수고와 고통, 우리가 지금 매일같이 겪고 있는 이 수고와 고통은 다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고통관입니다. 가장 오래된 고통관일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까지도 가장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고통관입니다.


   우리들 중에 많은 분들이 힘든 일들이 있게 되면, 생에 풍파가 밀려오면 제일 먼저 자기도 모르게 질문 던지는게 이겁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 집에 이런 재앙이 떨어진 게 아닌가?" 이게 바로 지금까지도 영향을 떨치고 있는 가장 전통적인 고통관입니다.


   재난은 사람이 스스로 빚어내는 것, 불이 불티를 높이 날리는 것과 같이 성서 여기, 저기에 이 전통적인 고통관이 널려 있습니다. 가장 오래 되었으며 가장 영향력을 떨친다는 증거이지요.


   시편, 그 시편을 펼치게 되면 제일 먼저 우리가 발견하는 시가 바로 이겁니다. 전통적인 고통관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악인과 선인과 이야기를 하는데요.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는 사람이여.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는 사람이여." 이런 사람들은 어떤가 하면 주님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인데 그들은 축복을 받아서 철따라 열매를 맺고 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산다는 겁니다.


   반대로 죄를 범하고 잘못된 행위를 범한 사람들은 어떤가? 마지막 구절에 보면 악한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보살핀다. 마지막 구절을 한 번 제가 다시 읽을 터이니 여러분들은 주제를, 주어를 한 번 주목해 보세요. 주어가 다릅니다.


   악한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하느님이 보살핀다. 주어가 다릅니다. 선하게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주어가 되니 하느님께서 축복하고 돌봐주시지만 악하게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벌을 주는 게 아니라 자업자득으로 스스로가 패망하듯이 자기 멸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고통을 받기 때문에 이것은 '벌' 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말 보다는, 스스로 지은 그릇된 행위에 의해서 벌을 받는 것이라는 겁니다.

  

                       ♠ 예수회 송봉모 토마스 S.J.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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