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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 4.30,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30 조회수485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2.4.30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사도11,1-18 요한10,1-10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기운으로 충만한 초록 빛 싱그러운 아침입니다.

 


“내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늘 들어도 싱그럽습니다.

바로 이게 성소요 이래서 수도승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은 영성생활의 원동력입니다.

이런 갈망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부활의 삶을 삽니다.

벽이 변하여 문이 된 삶입니다.


몇 가지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인권 변호사 김형태의 ‘비전향 장기수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 그런데 단체로 만난 빨갱이들은 꼭 무슨 수도승들 같았다.

  얼굴이 그리 맑을 수가 없었다.

  무슨 부흥회니 불사니 열어서 부지런히 돈 걷어가는

  속세의 성직자들에 어찌 그들을 비교할까.

  이게 무슨 조화 속인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게 그리 이상스런 일도 아니다.

  어찌됐든 감옥살이나마,

  이 험한 세상에서 처자식 벌어먹으려고

  돈과 잇속을 좇아 뒹굴지 않으니
수도승과 비슷하고,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들은 이타를 꿈으로 삼고 있으니 그러하다.

  누가 뭐래도 자본주의는 돈이 주인이고,

  사회주의는 돈과 권력에 핍박받지 않는 ‘평등세상’을 꿈꾼다.

  이것도 자기중심적(self-centered)으로 살지 않으려 애쓰는

  수도승과 비슷하다(한겨레4.28).-

 

 

 


자기중심에서,

자기의 벽에서 벗어나 활짝 열린 문으로 살 때 맑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삶의 지향은 다르지만 부활의 삶을 사는 이들의 모습 역시

이와 같이 맑고 밝습니다.


영화감독 ‘변 영주(한겨레4.28)’와의 긴 인터뷰 중

다음 한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 아무리 힘들어도 밖에서 위로를 찾으려 하지 않고

  영화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풀리는 데가 있더라고요.-

 

 

 



어느 분야든 치열하게 사는 자가 구도자이고

그 삶의 깊이에서 진리를 깨닫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겐 ‘영화’ 대신 ‘하느님’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은 하느님 안에, 부활하신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이 해인 수녀님과 만남의 느낌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수도원에 피정 온 자매들과의 만남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수녀님의 모습은 넉넉함, 편안함, 초연함으로 특징지을 수 있었습니다.


자매들의 청에 일일이 응해 주는,

자기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워진 모습이

꼭 다정한 언니와 같고 어머니와도 같았습니다.


그런 느낌을 말씀드렸더니

암 투병 후의 변화요,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사랑하면서 살려고 노력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벽이 변하여 활짝 열린 문 같은 부활의 삶을 사시는 수녀님이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푸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부활의 삶을 살기에

주님의 문을 넘나들며 생명을 얻고 또 얻어

충만한 삶, 넉넉하고 편안하고 초연한 삶입니다.


그 역시 주님을 닮아 이웃에게 맑고 향기로운 구원의 문이 됩니다.

왜 할례 받지 않은 이방 계 신자들과 음식을 나눴는지에 대해

항의하는 할례 받은 유대계 신자들에게

이를 해명하는 베드로의 야포에서

무아경의 환시 체험담이 좋은 묵상감입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주님의 말씀에 아집으로 가득한 베드로의 응답입니다.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자기 벽에 갇힌 완벽주의자 베드로입니다.



가능하면 ‘절대로’ ‘한 번도’ ‘결코’ 같은

극단적 용어는 쓰지 않는 것이 겸손이요 참 영성의 징표입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이

베드로의 ‘자기(ego)의 벽’을 일거에 무너뜨립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마라.”-

 

 

 


사람이 만든 성속의 이분법이지

하느님께는 모두가 거룩하고 깨끗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앞에 이분법의 벽은

하느님 앞에 활짝 열린 거룩하고 깨끗한 하나의 문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체험에서 솟아난 베드로의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에게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부활한 주님을 만나 활짝 열린 문으로 살게 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이들 역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고백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활짝 열린 문으로 부활의 삶을 살게 된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마음 문을 활짝 열어 주시고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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