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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사랑은 추한 사랑이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1-19 조회수485 추천수0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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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래서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든 이들과 죄인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창녀들도 포함됩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의 대상자'였습니다.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이토록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을 '사랑의 대상자'로 삼을 수 있을까요. <육의 사랑이 아니라 영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육의 사랑'이지만,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영의 사랑'입니다. 병든 이들과 보잘것 없는 약자들과 죄인들과 소외된 이들이 그 사랑의 대상자인 것입니다. 

의인들이 아닙니다. 강한 자도 아니며, 힘을 가진 자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말하는 '추한' 사람들이며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힘을 가진 자들은 힘으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육의 사랑을 행합니다.예수님처럼 고난 가운데 영의 사랑은 행동하지 못합니다.  

종교적으로 힘쎈 분들이 있고, 세상적으로 힘쎈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고난과 시련 중에서 사랑을 행하지 못합니다. 종교에서 주어진 힘으로 그리고 세상에서 주어진 힘으로 사랑을 할 수는 있지만 '추한' 것들은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에서 나는 '육의 사랑'과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의 사랑'이 다른 측면입니다.

[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1요한 4,7)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의 사랑마저 영의 사랑과 혼돈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은 비난을 면치 못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사랑을 행하지 않았다 하고 그렇게 단정내릴 수만은 없습니다. 그들의 율법적 가치에 따라서 사랑을 행하였던 것은 분명히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사랑'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귀엽고 똑똑하며 말을 잘하는 귀염둥이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지만 그 반대는 소외됩니다. 세상에서 뿐만아니라 종교에서도 당연히 존재해 있는 '인간적 사랑'(육의 사랑)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처럼 종교의 힘, 세상적 힘을 가진 분들은 예수님과 같이  '추한' 이들은 결코 사랑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비난하는 것과 전혀 색다르지 않습니다. 만일 그들이 사랑이 어디서 오는지 깨닫는다면 하느님께로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추한' 사람도 사랑하는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하느님의 사랑) 입니다.
 
육의 사랑과 영의 사랑("하느님은 영이시다")을 분별하지 못하고 모두 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하고 주장한다면, 진정 추하고 보잘것 없으며 가난한 약자들은 세상의 권력에 의해서 그리고 종교의 권한에 의해서 소외되어질 뿐만아니라 '추한 이'들을 사랑하기에 예수님과 같이 비난받고 멸시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이처럼 남들에 비해서 참으로 보잘것 없어 소외되는 추한 사람들을 도리어 더 아름답게 가꾸어 주는 '추한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보면 종교의 일탈에서 보면 추한 것을 사랑하는 '미친 사랑'입니다. 사랑의 대상자가 귀엽지 못하고 추하기 때문에 추한 사랑을 하는 그리스도는 고난과 멸시와 비난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추하고 약한 이들에게 악을 허락하고 죄를 용납하는 어둠의 우두머리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추한 이들을 소외하는 그들의 육의 사랑이 악과 죄를 불러들인다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이, 추한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미친 사랑으로 내려온다면 추한 것들은 아름답게 가꾸어지고 모든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내려 오지 못하고 있기에 추하고 약하며 보잘것 없는 이들이 남아 있으며 잘난 사랑의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멸시(그리스도의 남은 고난)도 아직 남겨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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