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9월21일(토) 聖엥베르 님등 선교사 3위 순교하신 날♥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20 조회수485 추천수0 반대(0) 신고

 



9월21일(토)
음8/17
聖엥베르 님등 선교사 3위 순교하신 날


앵베르 라우렌시오 새남터 1839.09.21
모방 베드로 새남터 1839.09.21
샤스탕 야고보 새남터 1839.09.21

 

 

 


성 엥베르 라우렌시오
관련성지 새남터 순교일 1839.09.21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며
주교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모방),(샤스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 교회 설립 53년 만에 비로소 선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1839년 초 신자수는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사제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나, 정 두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구노의 Ave Maria>

...구노Gounod,
Charles Francois (1818~1893)
대학 친구인 엥베르 범 주교의 순교에 헌정(獻呈)한 곡....

 

 


대학 시절 음악을 좋아했던 젊은이
사제가 되어 천만리 낯선 동양의 끝자락

죽음이 기다리는 조선 땅에 입국하여

 

사랑하는 신자들의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겨우 2년만에 다른 사제들과 함께 자수하고 순교하신...


聖 엥배르 라우렌시오 범주교 님이시여,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성 모방 베드로
관련성지 새남터 순교일 1839.09.21


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39.9.22일 순교)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서양인 사제로서는 처음 입국한 모방 베드로 羅 신부님,

최양업과 김대건 신부님을 사제의 길로 이끌고

 

그토록 사랑했던 조선 땅에서의 겨우 3년

35세에 새남터의 이슬이 되신

모방 베드로 羅 신부님이시여
영원의 천상 복락 가운데

우리 겨레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성 샤스탕 야고보
관련성지 새남터 순교일 1839.09.21


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가 된 정(샤스탕) 신부는
1836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 주교회의 자료집에서 발췌
 

 

 

 

상복으로 변장하고 어둔 밤 험한 산길로

신자들의 집을 찾아 헤매던 이방인 사제

 

소금에 절인 배추로 배를 채우며 이 마을 저 마을을 헤매던 나날

그러나 한없이 정다웠던 조선 신도들과의 만남에

환한 미소를 지었던 님

 

이 땅에서, 3년도 못 채우고 순교의 칼날 아래 쓰러지신

사스땅 야고보 鄭 신부님이시여



님을 기억하는 오늘
천상 복락 가운데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