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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 (야고1,19-2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19 조회수931 추천수1 반대(0) 신고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 (야고1,19-27)

 2월 20일 수요일 (녹)연중 제6주간 수요일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19~21)

 

야고보서 12~18절에서는 시험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바른 믿음의 자세에 대해 권면하였다.

이어지는 119~226절은 야고보 서간의 전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실천으로 입증될 수 있는 믿음, '행위와 믿음'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그 가운데 첫 단락이 119~27절인데, 말씀의 들음과 실천 및 오로지 실천으로만 입증되는 참된 신심(경건)에 대해 설파한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19)

 

구약 성경은 물론 유다교 문헌에서 이런 의미의 격언은 너무나 풍부하다 (잠언10,9; 13,3; 15,1; 29,20; 코헬7,9; 집회4,29; 1꿈란문헌5,25 등등). 일찍이 믿는 자들의 모임은 흔히 어떤 한 개인의 집에서 이루어 졌고, 이 모임에서는 말씀이 선포되며 성경의 진리에 관한 토론들이 있어 왔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씀을 듣거나 토론하는 자세에 대해 바른 지침을 주고 있다.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을 가지고 귀 기울여 경청한 다음, 충분히 생각한 후에 서서히 자기 의사를 드러내라는 것이다(잠언18,2). 그리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분노'라고 번역된 '오르겐'(orgen)의 원형 '오르게'(orge)타고난 '성질', 기질', '성격'이란 뜻 마음의 움직임 또는 동요에 대한 '충동', '욕구'라는 뜻 온갖 격렬한 감정을 의미하는 '분노', '', 진노'란 뜻이 있다. 본문에서는 세번째 뜻으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화를 안낼 수는 없겠지만(에페4,26), 성내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하며,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므로 할수만 있다면 화내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

"분노에 더딘 이는 용사보다 낫고, 자신을 다스리는 이는 성을 정복한 자보다 낫다." (잠언16,32)

이 외에도 잠언 1911, 1216, 151, 2511.15절 등에서는 분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식견이요, 대화시 합당한 말과 유순한 대답과 부드러운 혀를 통해 상대방의 분노를 잠재워야 한다고 말한다.

 

19,11 ; "사람을 관대하는 만드는 것은 사람의 식견이고, 남의 허물을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은 그의 영광이다."

12,16 ; "미련한 자는 불쾌함을 바로 드러내지만 영리한 자는 모욕을 덮어 둔다."

15, 1 ;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불괘한 말은 화를 돋운다"

25,11 ; "알맞게 표현된 말은 은 쟁반에 담긴 황금 사과와 같다"

25,15 ; "끈기는 판관을 설득하고 부드러운 혀는 뼈를 부순다"

야고보서는 이같은 믿음에 대한 실천적 권면을 많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신약의 잠언'이라 불리워진다.

 

그 다음, 야고보는 사람이 분노하는 것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대조시키면서 왜 사람이 화내기를 더디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분노의 감정 표출을 더디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의로움'(디카이오시넨 테우; dikaiosinen theu)이 무엇인가?

하느님의 속성이며 세상을 통치하는 기본 원리인 공의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것; 시편 89,15)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인간 행동 규범으로서 하느님의 기준인 이웃사랑을 말한다.

 

따라서 분노하면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한다. 분노하면, 마음의 판단력이 흔들리고 평정심이 무너져 하느님의 공의를 이루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분노로 인한 마음의 황폐함이 사탄이 일하는 터를 만들어 줄 뿐 아니라하느님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하기 때문이다. 분노하는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깃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분노는 옛 사람의 그릇된 본성을 버리지 못한 결과로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야고보의 이같은 명령의 직접적인 배경은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고 저주하는 것을 금지한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마태5,22).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 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21)

'그러므로'로 변역된 접속사 '디오'(dio)로 시작함으로써 앞절의 분노하는 것과본절에 나오는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더러움'으로 번역된 '파산 뤼파리안'(phasan rypharian)에서 '뤼파리안'의 원형 '뤼파리아'(rypharia)'불결', '더러움'이란 뜻으로서 때로는 상처의 불결함이나 몸이 땀으로 얼룩지고 오물로 더러워진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본문에서 단 한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은유적으로 도덕적 더러움을 의미하면서 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특히 이는 사람의 마음에서 입으로 나가는 악한 말을 가리키고 있다(에페4,31).

또한 '넘치는 악' (페릿세이안 카키아스; pheriseian kakias)은 마음속에 있는 악이 솟구쳐 올라 밖으로 표출되어 악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 안에서 악이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악의 속성이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 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벗어버리기만 하고 새로운 것으로 덧입지 않는다면, 그에게서는 본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 차원에서 본문은 '마음에 심겨진 복음의 진리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다'는 적극적인 권면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공손함'(온유함)에 해당하는 '프라우테티'(phrauteti)의 어근은 본래 사나운 짐승이 길들여진 상태, 고열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가 약으로 인해 진정된 상태, 갈증이 냉수로 인해 해갈된 상태 등을 말한다(마태5,5).

그런데 공손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 '마음에 심어진 말씀' 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로곤''로고스'(logos; 말씀; word)의 목적격이며, '마음에 심어진'으로 번역된 '엠퓌톤'(emphiton)의 원형 '엠퓌토스'(emphitos)'가르침을 통해 심기워진'이란 뜻으로서 이미 사도들을 통하여 수신자들에게 심기워진 가르침(18절의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

 

야고보는 심겨진 말씀이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을 "복음은 ~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고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는 사도 바오로의 진술(로마1,16)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복음에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원리와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삶 속의 윤리적 교훈도 포함되어 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22~25)

 

야고보는 19~21절에서 말씀을 신중히 듣는 자세의 중요성을 언급한 데 이어서 들은 바를 실행하는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아마도 야고보는 마태오 복음 715~27절의 산상설교 말씀,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이러한 원리는 로마서 213절의 바오로에게도 나타난다.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행함으로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을 뿐더러 야고보가 말하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속이는 자(사람)'으로 번역된 '파랄로기조메노이'(pharalogizomenoi)의 원형 '파랄로기조마이' (pharalogizomai)'위반','정도(正道)이탈'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파라'(phara)'계산하다'란 뜻의 '로기조마이'(logizomai)가 결합된 동사로 '잘못 세다','잘못된 추론에 의해 기만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야고보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사람들 의식속에 내재되어 있는 잘못된 자기 합리화가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듣고도 행하지 않음으로서 단순히 지적인 깨달음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게 되는데도, 본인은 하느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결국 영혼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야고2,14~26).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사람은 분명 자신의 얼굴을 통해서 주의 깊게 보기는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금방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잊어버린다. 더군다나 당시 거울은 동(bronze)으로 만들어져서 거기에 비추어지는 물체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주의 깊게 보지만 정확한 모습을 보기 힘들고, 또 보고서 돌아서면 거울로 본 기억마저 희미해졌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그릇된 모습을 발견했지만 잘못된 행동에서 돌이키지 않음으로서 말씀을 통해 자신을 본 것이 무효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18절의 '진리의 말씀'21절의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 (마음에 새겨진 말씀)과 일치한다.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문다는 것은 곧 진리의 말씀인 복음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복음의 거울은 모든 성경의 진리를 다 가리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어지는 27절과 21~13절의 진술로 보아서 특히 이웃 사랑의 계명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유의'(자유하게 하는)로 번역된 '엘류테리아'(eluthdria)는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업을 통해 주실 자유(갈라5,1), 하느님의 영이 역사하는 곳에 임하는 자유(2코린3,17)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원죄 아래 있는 사람을 명백히 죄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복음은 이처럼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자유를 구가하는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26~27)

 

여기서 '신심이 깊은', '신심'에 해당하는 형용사 '트레스코스'(threskos)와 명사 '트레스케이아'(threskeia)'떨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트레오'(treo)라는 어근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떠는', '신들에 대한 경외', '종교적인'이라는 의미이다(사도26,5; 콜로2,18).

그러나 여기서 앞서 나오는 '트레스코스''종교적인', '신앙심 깊은', '경건한'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뒤에 나오는 '트레스케이아'1세기 당시 기도나 금식등으로 표현되는 종교적 행위를 의미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종교적 행위들을 가지고 자신이 신심이 깊고 경건하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이러한 종교적 행위를 한다고 하여도 자신의 혀를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을 속이면서 신심깊고 경건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종교적 행위는 헛된 것일수 밖에 없다.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에서 '카타라 카이 아미안토스'(kathara kai amiantos;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는 본래 구약의 제의적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서(에제22,26),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는 제물 또는 하느님께 제사드리는 사제가 지녀야 할 필수 요건이다. 따라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경건)은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경건이며, 이 경건의 모습은 먼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으로 증거된다.

 

당시 종교, 사회적 배경에서 고아와 과부는 부양해줄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법적 권리를 대변해 줄 자를 갖지 못한 가장 비참한 위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사랑의 실천 대상이 고아와 과부의 두 대상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나그네 등 훨씬 포괄적이다.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 '세상'(세속)에 해당하는 '코스무'(kosmu)는 하느님을 거스르고 죄악된 옛 본성대로 살아가는 세속 사상, 가치관, 비도덕적 삶, 불경건한 심령 등을 두루 지칭한다.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 '거룩'이며 '경건'이다.

또한 '물들지 않도록'으로 번역된 '아스필론'의 원형 '아스필로스'(asphilos)는 부정 불변사 ''(a)''(2베드2,13), ''(에페5,27)로 번역된 '스필로스'(sphilos)의 합성어로서 원래 '흠없는','점없는','비난할 점이 없는' 이란 뜻으로 제의적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다(1베드1,19). 그러나 여기서는 '영적, 도덕적으로 순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쉬운것은 모두가 남의말, 그저 지식적으로 성경을 본다는 것이다.

왜 구약의 완성이 신약인지 안가르쳐 주는지 모르겠다. 

여기 굿뉴스 <우리들의 복음 묵상.체험>에서 사제들의 글들에서도 그저 세상이야기들이다. 

말씀은 면도칼(쌍칼날) 같다고 한다. 어렴풋 말고 분명히 볼수 있는 그날은 언제일까?

오늘 복음 '마르코 8,22-26' 묵상을 하면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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