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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 복음 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20 조회수733 추천수1 반대(0) 신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떤 마을을 향해 함께 걸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걸어가시면서 무언가를 묵상하시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많은 사상가들 같은 경우에 인류사에서 주옥 같은 사상이 때로는 거리를 산책하면서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한답시고 따르기는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결단을 하신 모양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밝히고 싶고 또 제자들에게 그걸 이젠 명확하게 인식시켜 줄 시기라고 생각을 하셨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드디어 말문을 여십니다.

 

뜬금없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한다면 좀 이상할 것 같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십니다. 그래서 대화의 화제를 일단 외부로 돌리십니다. 일반 대중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살며시 제자들의 생각을 넌지시 떠보시고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 제자들에게 이제는 돌직구를 날리십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따르냐고 하시는 듯한 질문입니다. 그러시자 베드로 사도가 나름 으뜸 사도랍시고 예수님을 향해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제자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관을 수정해주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즘 말로 말하면 대화의 기법이 아주 탁월하시고 센스가 있으십니다. 바로 그런 분위기를 만드시고 있는 듯하십니다. 제자들의 생각을 유도하시는 것입니다.

 

실제 이 당시에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메시아관은 세상적인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을 한나라를 통치하는 정치지도자로서의 메시아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이와 달랐습니다.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려는 게 진정한 메시아임을 알려주시려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가슴이 저려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보통 인간은 자신의 운명이 어떨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무신론자들은 세상에서 간혹 무당을 찾아 자신의 앞일에 대해 점을 쳐서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무당을 찾아가곤 합니다. 이런 걸 하려고 하는 심리는 앞일이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이 자신의 앞날인 운명을 알고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지요? 좋은 운명이라면 그게 현실화가 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희망적인 모습으로 기대를 할 수가 있을 수 있지만, 혹 자신의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 같은 운명이라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참으로 우울한 기분일 겁니다. 또한 믿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근데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을 소상히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그것도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너무나도 비극적인 인생입니다. 가련한 인생입니다.

 

크게 나누어서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고난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받으셔야 됩니다. 또 그것도 모자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야 된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해서 최후에는 죽음까지 이르시는데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나고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강조를 하십니다. 너무나도 끔찍하고 상상하는 것조차도 싫은 일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시는 걸 강조하시기는 하시지만 예수님께서도 이 길을 가는 게 두렵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도 인성도 지니시고 계셨던 분이시기 때문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솔직히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는 인간적인 고백을 하시지만, 그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 잔을 받아들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심정을 알기는커녕 제자들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적으로 예수님께서 나중에 정치적인 메시아로 이 세상에 우뚝 서셔서 등장하실 때 뭔가 한 자리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런 걸 꿈꾸며 예수님을 따랐는지도 모르는데 난데없이 그런 스승이 죽음의 길을 가야한다고 하니 자신들의 꿈이 물거품이 될 지경이라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을 겁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하소연하듯이 말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향해 사탄이라고 몰아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사탄이라고 하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좀 더 대의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셨을 겁니다. 바로 하느님의 일이라는 거시적이고 원대한 포부가 그 밑에 깔려 있으셨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피할 수 없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그 길은 자신이 걸어가야 하는 메시야의 길이고 그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은 그 무엇도 사탄이라고 생각하시고 또 걸림돌로 여기셨습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일까 하고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바로 육신의 일이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 육신을 입고 있는데 그걸 도외시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일도 생각도 하며 하느님 일도 생각을 할 줄 알아야 되는데 온통 사람의 일만 생각을 하고 하늘의 일은 생각을 하지 않으니 예수님의 입장에서 사탄이라고 말씀하실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된 이상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이 힘든 길이라고 할지라도 가야 할 것입니다. 그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또 자신을 희생하는 길이고 자아를 죽이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성경에서는 십자가를 진다고 표현을 하지만 영문성경에서 표현의 뉘앙스는 받아들인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용한다는 것일 겁니다.

 

진다의 어감과 받아들인다의 어감은 좀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수님 자신의 길의 운명을 아시고 담담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앞에 놓인 십자가가 있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해야 실제로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이고 자녀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길이 설령 가시밭길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가시밭길일지는 모르지만 마치 영화의 촬영기법과 편집의 하나인, 화면이 겹치면서 장면이 바뀌는 장면이 연출되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오버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런 길이 천국을 향하는 꽃길로 오버랩된다고 한번 상상을 하면 힘과 용기를 내서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잘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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